많은 걸 삼키고 조용히 흐르는 강, 미스틱 리버
클린트 이스트우드 최고의 작품을 뽑는 건 어려운 일이다.
대중과 평단을 모두 사로잡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나 그랜 토리노가 많은 표를 받을테고
비교적 최근작인 아메리칸 스나이퍼나 설리 허드슨 강의 기적을 선택한 사람도 있을 듯 하다.
고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용서받지 못한 자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첫 손에 꼽을 수도 있다.
그만큼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명작을 만들어 온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 중에서 내가 뽑은 최고의 이스트우드 영화는 2003년작, 미스틱 리버다.
지미, 숀, 데이브 세 친구는 길바닥에 이름을 써넣는 장난을 치다 낯선 차를 만난다.
경찰을 자칭하며 차에서 내린 두 남자는 공공시설물 훼손죄를 들먹이며 소년들을 위협하고
'훈육'을 해야겠다며 마지막에 이름을 써넣던 데이브를 차에 태우고 떠난다.
위협에 눌린 지미와 숀은 차를 타고 떠나는 뒷좌석의 데이브를 물끄러미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허나 그들은 경찰이 아닌 변태성욕자였고, 데이브는 3일간 감금된 채 학대를 당하다 기적적으로 탈출한다.
이후 세 친구들간의 거리는 멀어졌고, 결코 다시 좁혀지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 셋은 성장했다.
대장 기질이 강하고 거침이 없던 지미(숀 펜)는 뒷골목의 거물이 돼 실형까지 살고 나왔다.
출소한 후에도 여전히 조직과의 끈은 끊어지지 않았지만 애지중지하는 딸을 생각해서 적어도 겉으로는 손을 씻은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한다.
숀(케빈 베이컨)은 형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혼을 요구하며 떠나간 아내와의 문제로 끊임없이 번민하고 있다.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은 데이브(팀 로빈스)는 무능력자로 성장했다.
트라우마에 눌려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지 못했고 변변찮은 직업도 가질 수 없었다.
하는 일이라곤 어린 아들을 학교에 바래다주고 홀로 뱀파이어 영화를 보는 것 뿐.
이렇게 너무도 동떨어진 어른으로 성장한 셋은 뜻밖의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된다.
지미가 그렇게 아끼던 딸이 구타와 총상을 당한 변사체가 돼서 발견된 것.
절규하는 지미의 앞에 사건 담당 형사로 나타난 건 숀.
불편한 재회도 잠시, 수사가 좀처럼 진전되지 않자 지미는 뒷세계의 힘으로 자신이 직접 범인을 단죄하기 위해 나선다.
그걸 용납할 수 없는 숀은 수사에 더욱 매진하게 되고 마침내 유력한 용의자로 한 사람이 떠오른다.
그는 바로 데이브.
사건이 있던 날 밤, 데이브는 피투성이가 된 채 집에 늦게 돌아왔다.
걱정하는 아내에게 '강도를 만나 저항하다 오히려 죽을 정도로 마구 두들겨패서 이렇게 됐다'고 해명한 데이브.
하지만 그렇게 두들겨맞았다는 강도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데...
작품을 끌고 가는 세 명의 주연들은 막상막하의 연기력을 보여준다.
딸을 잃고 폭주하는 지미를 격정적으로 연기해낸 숀 펜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고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극도로 소심한, 상처받은 영혼을 연기한 팀 로빈스 역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강렬한 캐릭터의 둘에 비해 상대적으로 숀의 비중은 적지만, 케빈 베이컨은 숀이 가지는 중간자적인 특징을 제대로 살려내는 연기를 선보인다.
미스틱 리버는 가벼운 마음으로 볼만한 영화는 아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볼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보고 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런 류의 영화다.
의도적으로 관객을 자극하는 영화는 드물지 않다.
미스트, 퍼니 게임, 이든 레이크같이 대놓고 빡치게 만드는 영화도 많다.
(여담이지만 미스트의 광신도 아줌마로 유명한 마샤 게이 하든은 미스틱 리버에도 데이브의 아내로 출연한다)
그런 영화들과 비교해 미스틱 리버의 가장 큰 특징은 억지스러운 전개가 없다는 점이다.
사건은 우연했으나 그 사건을 대하는 인물들의 태도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그렇게 물 흐르듯 너무도 현실적인 파국으로 접어든다.
분노나 빡침이 아닌, 가슴 깊이 응어리지는 착잡함을 남기는 영화, 미스틱 리버.
후유증이 커서 두 번 보기는 힘들지만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