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소년은 웃었다. 단순히 걷는 게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걷는다는 행위 자체로는 끔찍할 정도로 지루하지만, 그 옆에는 소년이 지루할 새가 없도록 함께 웃어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놀 거리가 넘치도록 많았다.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른 채 정처없이 웃으며 걷는 길. 표홀히 벚꽃잎이 흩날리고, 어느새 매미가 울어여름을 알렸으며, 사락사락 쏟아지는 단풍잎이 바스락거렸다. 그러다가도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내려왔고, 인고의 시간이었던 겨울이 지나자 어느새 소년은 주변에 적막만이 위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많던 친구들은 사라졌다. 사시사철 지천에 널려있던 것들도 모두 사라졌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새로운 것이 소년의 흥미를 자극했던 시절은 사라졌다.
점점 소년은 마모되었다. 인생이라는 구만리 길을 걸으며 소년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 자조적인 농담을 중얼거리며 현실에 치여 바쁘게 살아가는 매일. 총천연색으로 빛나던 소년의 세계는 잿빛으로 물들어갔고, 밤하늘의 별이 하나하나 빛을 잃어갔다. 인생의 봄이 완연히 떠나고 여름이 찾아오자 소년은 팔소매를 걷어 올렸다. 이미 그는 소년이 아니라 어엿한 한 명의 어른이었다. 목을 갑갑하게 죄어오는 넥타이를 끌러버리고, 와이셔츠의 소매를 걷어올린 뒤에 반들반들하게 광을 낸 구두를 신고 빌딩 숲의 사이를 걸었다. 이미 길을 걷고 있는 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청년의 입가에는 까슬까슬한 수염이 돋아났다. 퀭한 눈가는 이미 검게 번져 있었다. 휴식이라는 행위는 반쯤 사치에 가까워서, 무작정 걸을 수밖에 없었다. 걷고, 걷고, 걷고, 또 걷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쉴 새 없이 걸어온 삶에서 청년은 하나의 톱니바퀴가 되었다. 이렇다 할 반역의 행위는 꿈도 꾸지 못한다. 톱니바퀴의 반란 따위,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그저 그 톱니바퀴를 불량품으로 인식하고 다른 넘치도록 많은 예비 부품으로 교체할 뿐. 청년의 머리카락이 빠지고, 배가 불룩해졌을 때 청년은 중년이 되어 있었다. 중년인이 되어서도 바뀐 것은 없었다. 꾸중 듣는 위치에서, 꾸중을 하는 위치로 바뀐 게 전부.
중년의 목에 밧줄이 매였다. 중년의 방에서는 매캐한 연탄 냄새가 흘러나왔다. 중년은 대교 위에 올라서서 차디찬 밤의 강물에 그 몸을 뛰어들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번 씩 중년은 죽고 있었다. 이제 절반 정도 걸어온 이 길이, 아직도 절반이나 남았다는 것이 미칠 정도로 암담하여 앞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일상에는 바뀌는 것이 없다. 중년은 그래도 무작정 걸었다. 걸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얼마나 더 걸었을까, 피부에는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기고, 듬직했던 덩치가 쪼그라들어 앙상한 노인이 되었을 때, 노인은 문득 멈춰 서서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소년 시절 함께 웃던 친구들은 어느새 모두 자신처럼 변해 있었다. 먼저 죽어버린 친구, 뒷방 늙은이로 밀려난 친구, 아니면 아직까지도 자신처럼 사회에서 여전히 제 갈 길을 걷는 친구까지. 모두 모습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네들의 사는 모습은 모두 자신과 똑같았다. 지팡이를 짚고, 뒷짐을 지고, 잘 보이지도 않는 눈에는 안경을 쓰고. 여전히 비틀비틀, 위태하게 제 갈 길은 걷던 노인이 보기에 지금의 모습은 썩 훌륭했다. 이미 다 지나온 길이 아닌가, 라면서.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기다려오던 노인은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야 오셨는가."
"미안허이, 할 일이 워낙 많아 늦었다네."
"이제라도 오셨으니 됐네."
"바로 갈 텐가? 아니면 조금 시간이라도 주면 되겠는가."
"다리가 많이 아프니 조금만 쉬었다 가세."
"그것도 좋지."
안경을 벗었다. 항상 짚고 있던 지팡이도 어딘가로 내던졌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몸은 되려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했다. 노인이 바라보는 풍경은 어느새 산의 중턱이 되어 있었다. 발 아래로 걸어오던 길이 내려보이고, 시원한 소슬바람이 불어와 노인의 앙상한 몸을 어루만졌다.
"왜 하필이면 중턱인가? 이왕 볼 경치, 정상이 낫지."
"뭘 모르시는구먼. 중턱에서는 중턱에만 볼 수 있는 경치도 있는 법이지."
"하여튼 괴팍한 노친네야."
그 대꾸에 노인이 피식 웃었다. 잔가지를 쳐내고 남은 앙상한 나무처럼,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앉아 발 아래를 내려다보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슬슬 가세나. 한참동안 기다렸는데, 시원섭섭하구먼."
"인생이란 게 원래 그런 법이지. 뭘 모르는구먼."
"옹졸한 차살세 그려. 그 말을 마음에 담아뒀는가?"
"잡담할 여유는 없으니 이제 가세."
"재촉하지 않아도 갈 걸세."
노인이 일어섰다. 다시 한 번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 아래로 도시의 밤이 조명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지겹도록 봐왔던 풍경이, 평생 봐왔던 풍경이 마지막까지 보는 풍경이라는 사실에 노인이 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찾아온 차사를 따라 그 뒤를 걸어갔다. 노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차고 기운 넘쳤다.
노인이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한 시간, 도시 모처의 병원에서는 시끄러운 기계의 알림과 함께, 노인의 손이 툭 하고 힘을 잃어 떨어졌다. 이미 숨이 멎은 노인의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