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 시
무등(無等)을 보며 : 서정주 시
가난이야 한낱 남루(襤褸)에 지나지 않는다.
저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여름 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까지야 다 가릴 수 있으랴. //
청산(靑山)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에 없다. //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 //
지어미는 지애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
지애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 //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우리는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일이요,
청태(靑苔)라도 자욱이 끼일 일인 것이다. //
* 감상 : 이 시는 서정주 초기시에 보이던 강렬한 생명의 솟구침이 가라 앉고, 화해와 달관의 세계로 나아간 1950년대 작품이다. 1954년경 광주 조선대학교 교수로 있었던 그는 6.25의 상처와 물질적 궁핍이 극심한 가운데 무등산(無等山)의 크고 의젓한 자태를 삶의 모형으로 삼아 이 시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