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계에서 이세계물이 유행하는 원인에 대하여

예전에 만화 관련 전공수업을 들었을때 대학 과제로 낸 리포트인데(신방과임), 갑자기 생각나서 올려봅니다. 리포트라서 읽기 불편할까봐 좀 내용을 쳐내고 수정해봤어요.

2010년대 중반 이후 일본 TV 방영용 애니메이션계에서 유행한 가장 대표적인 키워드는 말할 것도 없이 ‘이세계물’이다. 이세계물이란 현실에서 살던 주인공이 어떤 계기(주로 사고에 의한 사망)로 인해 이(異)세계에서 다시 태어나는 내용을 가진 작품들을 말한다. 일본의 이세계물은 현실 세계에서는 평범했던 주인공이 이세계에서는 특별한 능력을 보이며 주위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는다는 클리셰를 가지고 있다. 남성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특히 이세계물에 ‘먼치킨물’(주인공의 능력이 주변에 비해 압도적으로 뛰어난 케이스)을 결합한 것이 인기를 얻었다.(사진1) 이세계물 애니메이션은 현재로서는 대부분 남성향 작품들이나 여성향도 판타지 소설계에서 이세계물 바람이 불고 있으니, 머지않아 여성향 애니메이션계에서도 이세계물이 한바탕 유행할 것이다.

(사진1) '먼치킨' 이세계물 애니메이션 중 하나 <오버로드>

흔히 이세계물이 유행한 이유는 고증이 필요한 현실 배경보다 직접 세계관을 구축하는 것이 편하다는 편의주의적 이유 때문이라고들 말한다.(1) 일본의 TV 방영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만화 또는 소설(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한다. 이 중 라이트노벨계에서 이세계물이 한참동안 유행했고, TV 방영 애니메이션도 라이트노벨계의 영향을 받아 이세계물이 우후죽순 쏟아졌다. 확실히 라이트노벨은 아마추어라도 도전하기 편하며, 아마추어 작가가 현실고증이 필요 없는 이세계물을 선호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쪽짜리 이유이다. 수요가 있어서 공급이 있는 것이지, 공급이 있어서 수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일본의 TV 방영 애니메이션계에서 이세계물이 유행한 진짜 이유는 시청자가 이세계물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왜 시청자들은 이세계물을 원했는가? 그것은 요즘 젊은 사람들이 자주 쓰는 유행어를 통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생은 망했어.” 이것은 한국의 유행어이기는 하나, 현재 일본 사회의 문제와도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현실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으니 이세계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다.

일본에서 TV 방영용 애니메이션을 소비하는 것은 주로 10~30대의 젊은 세대이다. 청년들은 현재 일본 사회에 별다른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세계물의 시작이 대부분 주인공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2016)의 주인공 사토 카즈마는 트랙터에 치여 죽고 이세계에서 눈을 뜬다. <유녀전기>(2017)의 주인공 타냐는 지하철 선로에 떨어져 죽고 이세계에서 소녀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2018)의 주인공 리무루는 묻지마 살인마에게 살해당하고 이세계에서 전생한다.(사진2)

(사진2)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

앞서 평범하던 주인공이 이세계에서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이세계물의 클리셰라고 언급했는데, 이것에는 뛰어난 재능이 없는 평범한 자신이라도 인정받고 싶은 청년들의 욕망이 담겨있다.(2) 예를 들어 <이세계는 스마트폰과 함께>(2017)에서는 스마트폰을 가지고 이세계로 간 주인공이 스마트폰을 조작한다는 현대의 누구나가 가능한 일을 가지고 굉장한 능력처럼 취급받는다.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의 주인공은 현대의 물품들을 개발하여 이세계에서 팔아 큰 부자가 된다.(사진3) 주인공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평균 이하라는 설정을 가진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도 이세계에서는 현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3)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

노력하지 않아도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현실에서는 노력해도 보상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통계수리연구소의 일본 국민성 조사(2013)에 따르면 ‘노력해도 보상받지 못한다’라고 생각하는 20~30대 남성은 3분의 1을 넘었다.(3) 즉, 노력하면 된다는 말은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는 청년들이 노력하지 않아도 성공하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들의 욕망을 대리 충족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일본 TV 방영 애니메이션계에서 이세계물이 유행한 것의 이면에는 일본 청년들의 사회에 대한 절망과 자포자기가 내재되어 있다.

각주

(1) 議論沸騰！　異世界モノ連発中のラノベ業界に、作家・鈴木輝一郎が苦言「何もわざわざこんな…」

https://otapol.jp/2015/11/post-4746.html

(2) https://twitter.com/4122212e16/status/1008198075326722049

(3) 統計数理研究所(2013) 『<日本人の国民性 第13次全国調査』

참고자료

라이트노벨과 현대 일본의 젊은 세대 - 웹소설 투고 사이트 발신(発信) 작품을 중심으로> 남유민, 2018

http://www.kaja.ne.kr/journal/article.php?code=63037&vol=116

사실 좀더 상세히 따지려면 소설가가 되자 사이트 얘기를 빼놓을 수 없긴 한데 거기까지 쓰면 교수님이 너무 마니악하다고 생각하실거 같기도 하고(...) 과제 주제가 애니메이션이었던 만큼 이정도만 썼습니다.

남성향 이세계물은 이제 식상하다는 사람도 많아져서 2~3년 안에 망할거 같지만, 여성향 이세계물은 이제 발동이 걸리는 단계인 것 같아요. 여성향 이세계물의 대표작 두개(책벌레의 하극상, 여성향 게임의 파멸플래그밖에 없는 악역 영애로 환생해버렸다)가 애니화 발표가 되었으니 말이죠.

한국도 여성향 판소는 책빙의물, 환생물, 회귀물이 차지한지 오래고 남성향도 요즘 문피아 보면 책빙의물이 유행하는거 같던데, 일본 청년들이랑 별반 다를게 없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