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기억도 아득한 1992년, 15여 년 전 일입니다.
그해 가을학기 때 학교에 신관이 들어섰습니다.
교실수가 부족해서 오전, 오후 반제를 실시하던 시절이었는데
고학년인 4, 5학년이 신관에 배정되었습니다.
5학년이었던 저는 가장 높은 4층이었습니다.
신관으로 배정되어 새로운 교실이 익숙해질 무렵이었습니다.
4층으로 올라오는 마지막 계단 건너편의 벽(옥상계단은 반대쪽)에 이상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얼핏 그냥 장난삼아 뿌린 먹물처럼 보였지만,
전체를 멀리서 조망하면 그건 분명 그림이었습니다.
한복을 입고 머리에 쪽을 진 어머니가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앉아있는 모습.
누군가 일부러 한 것이라기엔 너무 높았고,
크기는 2층 높이의 벽을 반이나 메울 정도였습니다.
선생님들은 우연이라고 무시했지만, 아이들은 날마다 그 앞에 모여 관찰하곤 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그림이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얼굴에 아무 것도 없었지만
지금은 살포시 웃고 있는 입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한 일은,
4층 계단의 천장에 언젠가부터 희미한 발자국이 생겼습니다.
처음엔 세 개였는데 어린 마음에도 누가 신발 따윌 던진 거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떠올라서 고개를 들면 어느 샌가 천천히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제가 학년을 마치고 본관의 6학년 교실로 옮길 때까진 정확히 열한 개.
하지만 본관으로 가고 나자 점점 잊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졸업을 앞두게 되었는데
문득 신관의 그림자가 생각났습니다.
졸업하기 전에 확인해봐야겠다는 괜한 호기심에
친구들과 신관을 찾았습니다.
이럴 수가……. 벽화는 왠지 기분 탓인지 더 진해보였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천장의 발자국은 더 늘어나
어느새 5학년 교실이 있던 복도 앞에서 멈춰 있었습니다.
우리는 온 몸이 오싹해져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습니다.
당연히 그 근처엔 얼씬도 하지 못했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가끔 동창들과 그 일을 떠올리며
'에이, 그냥 애들 장난이었겠지' 하며 웃어넘기긴 하지만,
장난치고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지금쯤 그 발자국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