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야간자율학습
야간자율학습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분명히 종소리를 들었음에도 서둘지는 않는다. 제 발로 그림자에 갇혀야 한다는 생각에 진이 빠지는지 자신의 반으로 돌아가는 분주한 군중들 속에서 홀로만 한가하다. 여유롭게 복도를 거닐다 자습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모두들 고개를 푹 숙인 채 분주히 무언가를 적고 있다. 처음에는 늦게 들어오는 그에게 부산히 시선이 쏠렸으나 이제는 종소리 뒤, 몇 분 후에 들리는 손잡이 덜컥거리는 소리가 익숙한 듯하다. 그는 맨 앞 줄의 자신의 자리에 앉는다. 얼마 동안 눈만 껌뻑 거리며 뻥하다가 앞 줄에서 느껴지는 뒷 그림자들의 암묵적인 시선과 분주히 연필을 놀리는 분위기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덥석 펜을 잡는다. 뭐든 끄적끄적 적어보지만 도통 집중을 못한다. 괜스레 손목 시계의 초침을 흘깃거려 보지만 분침의 끝은 변함이 없다. 그는 또다시 상념에 빠진다.
어느새 자습 시간이 끝나고 끝 종이 울린다. 이미 짐을 싸 놓았던 학생들이 무리를 이뤄 밀물 빠지듯 순식간에 빠져나간다. 야간자율학습에 적극적이지 않은 그이면서도 또, 집에 돌아가는 것도 달갑지 않은지 종이 울린 후에야나 한가롭네 짐을 꾸린다. 매번 마지막으로 나오는 그는 전등을 끄고 문을 닫는다. 이윽고 자습실 안을 들여다 본다. 어둠에 싸여 스산한 기운마저 감도는 방에 걸쇠를 단단히 걸어 잠근다.
하루 종일 기를 빨려 뒷모습마저 초췌한 그는 불 꺼진 지하상가 아래로 내려간다. 별안간 투명한 유리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유리문에 누군가 비친다. 양 죽지에 무거운 가방을 매어 어깨가 축 늘어졌다. 머리칼은 푸석하고 꽉 조여 맨 넥타이 때문에 숨을 쉬기 어려워 보인다. 넥타이의 대가리는 검게 색이 바랬고 흘러내려가 코에 걸친 안경에 비쳐 눈은 흐릿하다. 반투명한 그 누군가의 속에는 무엇도 비치지 않는다. 한참을 유리문 앞에 서 있다, 주머니에서 손 꺼내기도 맥 빠지는지 발 끝으로 문을 밀쳐내고 어느 틈엔가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그는 왔던 길을 따라 제자리로 돌아간다. 문이 서서히 닫힌다. 좁아지는 문 틈 사이로 보이는 형체는 점점 희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