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차고 : 김영랑 시
을 차고 : 김영랑 시
내 가슴에 독(毒)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害)한 일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흩어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고 //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 않아 너 나마저 가 버리면
억만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虛無)한듸!’ 독은 차서 무엇하느냐고? //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날 내 외로운 혼(魂) 건지기 위하여 //
* 감상 : 이 작품은 김영랑의 현실 인식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작중의 시적 화자는 현실 순응주의를 버리고 결국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해’ 현실에 맞서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할 것을 결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