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규- 집을 비우며
문은 늘 열어두기로 했으니 외출에서 돌아오시듯 그렇게 하시게
읍내에 혼사가 있네 군불은 때야 할 터 마른 삭정이들은 헛간 가득
쌓아 두었네 차도 끓여 드시고(커피는 바닥이 났네) 음악도 들으시게
심심하면 뜨락 마른 꽃대 사이 느리게느리게 건느고 있는 겨울 햇살
들의 여린 발목이라도 따라가 보시게나 늘 발이 시리다는 핑계로 다
가지 못한 길들을 우리는 너무 오래 던져두지 않았었나 그래도 무료해
지시거들랑 어젯밤, 이슥토록 내린 뒤뜰의 눈을 쓸지 않고 그대로 놓아
두었으니 거기 발자국 낙관이라도 찍어 보시게 새 한 마리 내려와 갸웃
거릴 것이네 그간 내가 아껴놓은 그것을 이미 그도 알고 있었기에 범접을
못하다가 그대 낙관 곁에 이때다 싶어 맨발을 재재바르게 내려 놓을 것이네
이내 가지에 올라 갸웃거릴 것이네 이제 그만 우리들의 방황을 접을 때라고
말하고 싶네 떠날려면 자네도 몇 자 적으시게 해질 무렵 산길을 지우며
올라오는 나를 창 밖으로 내려다 볼 수 있다면 더욱 고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