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감 설정을 읽고 디지몬의 강함을 판정하고 싶으신 분들께.
사실을 이야기하자면 디지몬 도감이라는 페이지는 언젠가 구체적인 작품에서 쓰일(쓰인) 디지몬들의 설정 원안을 공개하는 곳일 뿐입니다. 반다이는 이러한 도감 설정에 기재된 디지몬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각종 미디어 믹스에서 캐릭터를 만들어나갑니다. (그 반대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도감에 원안으로서 기재되기 때문에 앞서 말한 모양새가 되어 버립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실 이쪽이기 때문에 본가 설정을 매번 각 작품에 충실히 반영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태생적으로 도감 설정 캐릭터와 미디어 믹스 캐릭터는 일치할 수 없습니다. 이건 당연한 일입니다.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작품화한 시점에서 그 세계와 그 안의 캐릭터들은 본가 도감과는 다른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되어야만 합니다. 각자의 스토리를 가지는 순간에 이미 각 디지몬들은 원화가 아닌 살아있는 캐릭터가 되니까요. 스토리 전개를 위해, 그 도중에 살이 붙고, 작품 전개에 필요없는 요소는 빠집니다. 등장 인물의 행동 자체가 현재진행형으로 그 디지몬의 새로운 설정이 됩니다.
도감에 명백히 쓰여 비교된 경우를 제외한다면, 전투능력을 추측할 유일한 방법은 싸움의 전적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캐릭터의 활약을 통해 그 강함에 대한 이미지를 갖습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중 디지몬 어드벤처를 안 보신 분들이 없겠지요. 그 작품의 인상은 정말 강렬했고, 우리가 생각하는 디지털 월드와 그 거주민들에 대한 이미지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장 에테몬이나 반데몬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려 봅시다. 그 둘의 전투력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하고 계실 터인데, 그 영향은 설정 도감에 의한 것보다는 어드벤처에 의한 것이 더 클 겁니다. 도감 캐릭터를 논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어드벤처서 얻었던 이미지를 통해 그들을 들여다봅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강함의 이미지는 활약을 통해 구체화되기 때문에, 우리는 설정 도감 해석을 하는 도중에도 이미 각자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미디어 믹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이론을 적용한다면, 어드벤처를 많이 보거나 인상깊게 본 사람, 최근에 본 사람일수록 설정 도감을 읽을 때 어드벤처 캐릭터의 인상에 영향을 많이 받겠지요. 여타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교대상을 언급하며 강함을 강조한 게 아닌 이상 어림잡아 얼마나 강한지를 따지는 건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왜냐면 그렇게 각자가 판단한 상대적 강함은 애초부터 도감만을 순수히 참조한 것일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가 설정 세계에 존재하는 디지몬의 강함에 대해 외부 이미지로부터 독립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아예 작정하고 도감 설정문만 읽으려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봤자 뻔한 결론만 도출될 뿐입니다. '모른다.' (대놓고 쓰인 걸 빼면) 오직 그뿐입니다. 일단 비교하고 그것을 즐기려는 팬인 여러분들께 그런 이미지의 적용을 내팽개치라는 것은 잔인한 일이지요.
특정 디지몬의 강함에 대한 논란 역시 이런 이미지의 차이에서 나타납니다. 다른 디지몬에 비견해서 상대적으로 얼마나 강한지는 설정 문구 해석만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두가 각자가 영향받아온 환경에 따라 이미지를 적용시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진 자신들의 이미지를 '올바른 것'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랬기에 그와 다른 타인의 이미지를 '틀린 것'으로 생각하게 됐고, 결국 그것을 비난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이미지는 각자의 창작(추측)인데 말이지요. (창작이라도 공식 설정에 부합하는 게 있고 아닌 게 있다고 생각하는 당신께! 도르빅크몬의 애완 황룡몬이 바로 공식 캐릭터 해석입니다. 아 참, 루체몬에게 봉인당했다는 설정도 디지몬 생활이란 모바일 게임 세계에서 있었던 일일 뿐이예요. 디지몬 도감에 황룡몬은 없답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에서 서로의 생각이 부딫힐 때에는 상대를 설득해 자기와 같은 해석을 하도록 하기 위해선 각자의 이미지가 생겨난 사유의 연원을 밝힘으로써 공감을 유도해야 합니다. 남의 이미지는 틀리고 내 이미지는 맞다, 이건 말이 안되는 주장입니다. 이미 상대방에겐 그 이미지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미지들의 모순을 지적하는 식으로 공격할 순 있겠지만, 그건 무너뜨릴 뿐 자신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게 하는 거랑은 다른 문제죠. 그리고 자기 이미지라고 모순이 없을 거란 보장도 없고요.)
그러니 타인과 의견이 맞부딫힐 때, 당신이 생각하는 그 디지몬의 강함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합리적인 판정에 의한 결과물인지, 전부터 있어왔던 이미지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인지 말입니다.
전자라면 그 주제로 디지몬 팬과 길게 논쟁할 일은 없을 것이며, 후자라면 그것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vs놀이는 건전하게 시작될 수 있습니다.
설정 도감의 캐릭터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거기에 적힌 문장이 전부입니다. 그들의 존재는 정말로 그 문장 자체입니다. 그 몇 개의 문장을 넘어선 추측이나 비교가 붙고 전투하는 존재가 된 시점에서 이미 당신이 논하는 디지몬은 도감의 원화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동인 캐릭터가 된 겁니다.
그러니 조심하세요. 상대의 2차 창작 속의 디지몬이 당신의 2차 창작 속 디지몬과 같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선 매너있는 vs놀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전 이제까지 한번도 건전하고 매너있게 디지몬 vs놀이가 이루어진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슬슬 보고싶어지네요.
진지하게 다 읽고 내용을 이해하신 분이 한 분이라도 있음 만족스럽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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