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한나라 남양의 가수(假守·임시 군수)였던 등(騰)은 출신이 불분명했다.
이름은 있지만 성이 없었다. 그는 한나라의 명문 거족출신도 세습 귀족도 아니어서 충성도가 낮았고 매수 가능성이 높았다.
진왕 정 16년, 기원전 231년 한(韓)나라의 남양태수 등이 남양땅을 통째로 들어다 진나라에 투항하는 일이 발생한다. 진나라는 한나라의 남양땅이 통째로 투항해오자 본래의 조나라를 멸하려던 계획을 바꿔 한나라를 먼저 멸하기로 결정한다. 진나라는 남양을 접수한 뒤 등을 태수로 명하고 실제로는 이곳을 전진 기지로 삼아 언제든 한나라를 공격해 멸할 만반의 준비를 마치도록 했다. 진왕 정 17년, 기원전 230년 내사(内史)로 임명된 등 진시황의 명을 받아 10만의 진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는척 하다 기습적으로 남하해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신정을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고 설사 알았다고 해도 진군의 공격을 저지할 무력조차 없었던 한나라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군은 빠르게 한나라의 수도인 신정에 다달았다.
한나라의 조야는 경악했다. 등은 오랫동안 한나라의 관리로 있었고 한나라의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가 한나라 정벌의 사령관으로 온 이상 한나라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낮았다. 또한 내사(内史)라는 관직은 관중의 전체 방어업무를 관장하는 진나라의 고위층이다. 투항자인 등이 진나라에서 받는 대우를 보고 한나라의 대신들과 한왕 안(韓王安)은 자신들도 투항을 망설이게 된다. 이 때, 울료는 한왕 안(韓王安)에게 서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고 후작지위의 보전을 약속한다. 진나라의 철저한 준비하에 계획된 침공이었다. 한나라는 강력한 진나라군에 의해 막다른 곳에 몰렸고, 타국의 지원은 요원해보였다. 저항이 무의미해 멸망이 단지 시간문제임이 분명했다. 조정에서의 짧은 담론이 있은 후, 한왕 안(韓王安)은 진나라에 항복하고 한나라는 멸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