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vs 이완용
안중근 의사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때부터 사격실력이 뛰어났다고 함
얼마나 뛰어났냐면 화승총으로 20보 밖에 있는 동전을 명중시켰다함
이는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던 김구가 백범일지에 묘사함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때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1908년 봄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이 부대는 이범윤의 의병부대로 알려져 있음.)
의병부대의 규모는 300명 정도로 두만강 부근의 노령을 근거지로 군사
훈련을 실시하며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였고 1908년 6월 제1차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이 작전에서 일본군 수명을 사살하고 수비대의 진지를 완전히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고 그해 7월 홍범도의 의병부대와 연락을 취하며 제2차 진공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에서 일본군10여명과 일본 상인을 생포하였지만 안중근은 포로를 석방하였고 이로 인해 의병부대의 위치가 발각되면서 대패하고 말았다.(회령전투)
유명하진 않지만 안중근은 전투, 전술에도 능했음
vs
병싄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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