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잡종을 좋아하는 아리마는...
(의미심장한 아리마의 시선처리. 하이세를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있기를 바랍니다.)
카네키였던 사사키를 지켜보고자 하는 마음이 깊다는 걸 알 수있겠네요. 적어도 자신에게 이득(먹고 재운 다음 쿠인케로 쓴다던가... ><)이 될거라는 계산 하에 카네키를 데려간 건 아니라고 예상해봅니다. 오오 아버지 오오.
일단 제 생각.
저는 도쿄구울 작품 내 다른 누군가가 아닌 '아리마'가 카프카의 잡종을 '재미있다'라고 말한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리마가 재미있다고 했으니 아리마가 왜 재미있어 했는지만 보면 될 거 같다는 소리죠.
하이세에게서 책을 빌려 본 아리마는 카프카의 여러 단편들 중 유독 '잡종'에서만 특별한 즐거움을 느꼈다는 건데... 그 즐거움이 뭘까요? 저는 아리마가 크게 '공감'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소설을 읽고 공감하는 즐거움)
'고양이도 염소도 아닌 그 동물'을 지켜보기로 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구울이면서 동시에 인간인 카네키'과 '아리마'라는 실제 현실을 떠올린 거죠.
음. 일단 간단하게 카프카의 잡종 스토리와 아리마의 상황을 비교해봅시다.
먼저 첫번째.
작중에서 '나'가 아버지의 유품으로 짐승을 받았다는 건 아리마가 CCG에게서 카네키 켄에 대한 결정권을 모두 위임받았다. 정도로 해석된다고 봅니다.
'아버지', '유품'이라는 단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충분히 다른 내용으로 해석이 될 내용이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게 더 자연스럽게 느껴지네요.
+
(14. 12. 5) 츄잉 게시판에서 어쩌면 '아버지'는 히데가 아닐까라는 의견을 보았는데 꽤나 의미있는 추측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리마가 카네키를 관리,감시하는 권한을 받았으니 '아버지의 유품' 부분을 대충 CCG라고 때웠는데 '히데'의 부탁으로 카네키를 맡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꽤나 매끄러운 해석이 됩니다.
(출처 : http://www.chuing.net/zboard/zboard.php?id=mtokyo&page=1&sn1=2&m_id=&divpage=2&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6114 쿠마★님의 추측글.)
두번째로
이 짐승이 고양이와 양의 모습을 모두 가졌다는 것. 그런데 그 짐승이 '나'에게 오기 전에는 고양이에 더 가까웠다는 것. 작가님께서 아리마와 사사키의 관계를 카프카의 잡종을 통해 보여주시려던 의도라면 아리마에게 오기 전 카네키군은 고양이, 그리고 지금 아리마와 함께 지내는 사사키군은 양적인 특징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겠네요. 이렇게만 말씀드리면 감이 잘 안오실 것 같아서 이 부분에 대한 문학사전의 의견을 가져왔습니다.
「...이 동물은 우유를 마시는 한편, 맹수의 이빨을 지니고 있다. 이 동물은 얌전한 양에서 출발하여 투쟁적인 고양이를 거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개로 발전한다. 화자와 모순으로 가득 찬 동물 사이에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존재한다. 희생(양)과 투쟁(고양이) 사이의 모순을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해결할 수 있는 동물과 마찬가지로 카프카는 죽음 속에서 내적 긴장의 해소를 동경한다. 여기에서 문학작품을 통한 카프카의 내적 삶의 객관화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기대와는 달리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은 죽음은 카프카의 문학적 유산이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소각되지 않은 것을 암시한다.」(네이버 지식백과 펌)
...어려운 말들이 많지만 간단하게 도쿄구울 식으로 치환해보면 고양이-투쟁심, 양-자기희생적인 모습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양과 고양이 사이에서 갈등하던 1부의 카네키는 결국 143화로 완결될 쯔음에 고양이의 모습(완전한 구울이 되어 인간들에게 맞섬)으로 절정을 맞은 다음 아리마에게 와서 이번 2부에서는 투쟁보다는 희생적인 모습을 더 보여줄 것이라는 암시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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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종'에서 짐승이 고양이에서 양으로, 그리고 양에서 이제는 개가 되고 싶어하는 것 같다라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하이세는 자신 안에 있는 불안정한 두 존재, 고양이(구울)이면서도 양(인간)인 자신의 불안정한 정체 속에서 그 둘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눈물 흘리는 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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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2. 5) '양-인간으로서의 평화' 라는 표현은 문학사전의 해석을 인용하려 했던 제 의도와 많이 엇나간 것 같아서 '고양이-투쟁, 양-자기희생적 모습'으로 수정했습니다. 아무래도 글을 쓸 당시, 너무나 작고 멍청한 제 머리로 어떻게든 도쿄구울과 '잡종'의 일치성을 찾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일어난 오류인 듯 합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글을 봤을거란 생각에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ㅠㅠ
세번째로 이 짐승이 고양이의 모습을 지녔으면서 쥐를 무서워 한다.
고양이가 구울의 모습이었으니 쥐는 당연히 고양이가 먹는 것, 인간입니다. 상식적인 구울이라면 '엥?'하겠지만 카네키라는 구울이라면 이해가 되죠.
카네키는 반 구울인 상태였을 때 구울인 자신이 살기위해 인간을 먹는것은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인간을 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인물입니다. 허기감 때문에 잠깐 방심하면 인간을 먹어버릴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을때도 '나는 살인을 할 수 없어'라며 울부짖던 구울이었습니다.
포식자인 고양이가 쥐를 피하는 것과 반구울인 카네키가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하는 것. 비슷하지 않나요?
네번째로 우유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까 어떤 분의 댓글에서 봤었던 모성애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것 말곤 마땅하게 대입시킬만한 게 떠오르지 않네요.
고양이(구울)도 양(인간)도 태어나서 크는 과정동안 어머니의 모유를 마시고 자랍니다. 우유라는 소재가 어머니(크게 보면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라고 한다면 부모님을 너무 슬프게 떠나보낸 카네키가 하이세가 되어서도 무의식적으로 부모님의 사랑을 그리는 것(당장 아리마와 아키라를 단순 스승이 아닌 아버지, 어머니라고 묘사하는 것만 봐도..)은 자연스럽게 짐승이 단 우유를 좋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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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2. 1) 우유를 희생이나 고통으로도 충분히 해석 가능하다고 봅니다.
또 댓글에서 카즈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피로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봅니다. 모두 추측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자신이 생각하는 '우유'의 상징적 의미를 떠올려보시는 것도 좋겠네요. :)
마지막으로 소설 속에서 '나'가 그 짐승을 죽이는게 좋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결국 짐승의 삶을 지켜보기로 생각하는 장면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대다수 팬 분들의 해석이 일치했습니다. 나=아리마, 짐승=하이세이므로 '아리마는 카네키 켄이라는 존재가 죽음으로써 평안을 얻을 거라는 생각을 했으나 생각을 고쳐먹고 그가 어떻게 살아나갈지 지켜보기로 했다' 정도로 해석이 됩니다.
음.. 아직도 많이 부족한 글입니다.. 한번 써볼까? 하고 쉽게 맘 먹고 손 댈만한 글은 아니었던 것 같네요.
(http://gkim.dothome.co.kr/G/entry/Franz-Kafka-%EC%9E%A1%EC%A2%85%ED%8A%80%EA%B8%B0) 이 링크를 타고 가시면 간단하게 카프카의 '잡종'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게시판에 올려진 건 토막적인 내용이었더군요. 한번 읽어보시고 여러분들의 의견은 어떠신지 함께 이야기 해보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한가지 확실한 건 사스가 카네키... 문학소년 답군요. 아리마도 문학을 즐길 줄 아는 지성인인 것 같구요. 최종적으로는 작가님이 정말 문학 작품에 대한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만화책 한권을 읽으면서 좋은 책들 많이 알아가게 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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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짐승은 양쪽에 불안감-비록 두 가지 불안감이 서로 매우 다르기는 하지만-, 즉 고양이의 불안감과 양의 불안감 모두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가죽을 너무 답답해하는 것 같다. (카프카의 '잡종'에서 발췌)」
여담이지만 저는 카프카의 '잡종'에서 이부분이 가장 눈에 들어왔습니다. 카네키라는 인물과 많이 겹쳐져 보이기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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