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게문학/약스압]사슴9(끝)
식탁에 앉았다. 이미 나 빼고 다들 밥을 먹고 있었다. 밥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에 유리가 라헬과 비올레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지 물어봤다. 토론이 벌어졌고, 결국 비올레는 월하익송에 가고, 라헬은 자하드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탑을 오르는 것으로 결정됐다. 시험관의 절반이 퍼그인 시대에 라헬이 안전하게 탑을 오를 수 있을 지 걱정됐다. 문제는 아게로와 라크의 처리 방안이었다. 라크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아게로는 위협이 될 수 있었다. 라헬의 증언이나 내가 아게로를 봤을 때의 직감을 종합해 보면, 지금 죽여야 했다. 라헬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비올레는 당연히 친구를 죽게 하기 싫어했다. 유리도 비올레 편을 들었다. 결국 비올레가 주의해서 아게로를 감시하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이런 저런 얘기들을 하다 보니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10시였다.
평소에 일찍 자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은 피곤해서 일찍 자고 싶었다.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양치를 했다. 내 침대에서 잘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갑자기 유리가 위층으로 올라가더니, 벽장에서 이불과 베개를 막 꺼내서 들고 내려왔다.
"뭐야?"
"아래에서 이불깔고 자."
"뭐?" 오랜만에 비올레랑 재회해서 신난 건 알겠지만, 이건 심했다.
"침대는 나랑 밤이랑 쓸거야. 11시부터 4층으로 올라오지 마." 옆에서 지켜보던 라헬의 얼굴이 붉어졌다.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이 뒤섞였다. 지금 전창 한발 쏘고 시작하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냥 죽여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유리는 내 말을 무시하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양치를 끝내고, 조용히 잠자리를 준비했다. 그리고 라헬을 눕히고,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바로 의식이 꺼졌다. 그 날은 처음으로 라헬보다 일찍 잠든 날이었다.
그렇지만 깊게 잠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새벽 2시 즈음이었던 것 같다. 크게 시끄럽지는 않았지만 여러가지 잡다한 소리가 내 신경을 긁어서 깼다. 일어나보니 라헬은 이불에서 나가려고 하고 있었고, 밖에서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그때 나는 라헬을 의심부터 했다. 나는 바로 라헬을 붙잡았다.
"뭐 하는거야. 왜 안 자고 있어." 라헬은 내가 일어난 줄 몰랐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잠이 안 와서 포켓 하고 있었는데... 누가 벨 누른 것 같아서 확인하려고..."
"지금 시간에 누가 벨을 눌러." 나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몽롱한 상태로 확인하러 갔다. 모니터를 봤다. 잠이 확 깼다. 화이트였다.
화이트는 벨을 몇 번 더 누르더니, 스피커로 협박까지 했다. 지금 내가 뭘 해도 화이트가 들어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문짝이라도 지키기 위해 나는 내 손으로 문을 열었다.
화이트는 손에 칼을 잡고 있었다. 여기에 온 목적은 뻔했다. 화이트는 날 죽이고 라헬을 데려가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 왜 왔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여긴 어떻게 찾았어?" 나는 좀 더 합리적인 질문을 했다.
"준구의 시체를 보고 바로 알았다. AA가 죽인 걸로 위장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너무 문제가 많았어. 우선 AA에 비해 목의 절단면이 너무 매끄러웠다. AA스타일이랑 달랐어.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준구의 포켓이 전기조작술로 고장나 있었는데, 넌 몰랐겠지만, AA는 전기조작술을 쓰지 못해. 거기서 그런 전기조작술을 쓰는 놈은 너밖에 없지."
나는 그 대목에서 조금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전기조작술도 쓰지 못하는 쿤 가문 사람이 있을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퍼그에게 준구를 죽인 게 AA라는 확신을 주기 위해 두개의 기호를 남겨놨다. 그런데 하나는 화이트의 전문성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하나는 역으로 내가 범인이라는 기호가 되었다. 전기조작술도 못 쓰는 쓰레기가 쿤 가문에 있다니...
"그래서?"
"역 화장실에서 죽였으니 다음 단계는 당연히 기차를 타고 도망가는 거였겠지. 그래서..."
나는 화이트의 말을 끊었다.
"133층으로 와서 CCTV들을 다 확인한 끝에 우리 집을 찾았다고? 그거 불법인데."
"불법이면 못 하나?" 화이트의 칼에 말라붙어있는 피가 보였다.
"...혼자 왔어?"
"안심해라. 아무한테도 알리지 않고 짐 혼자 왔으니까."
"다행이네."
"어서 라헬을 넘겨. 짐도 라헬 앞에서 피를 보는 건 원하지 않아."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닌데."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라헬이 이쪽으로 왔다.
화이트가 라헬에게 말했다.
"라헬, 지금 오면 이 랭커는 살려주마. 짐이 책임지고 감금 같은 일은 다시는 없도록 해 줄 수 있어."
나는 뒤를 돌아봤다. 라헬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라헬의 눈동자가 계속 흔들렸다.
"죄송해요. 화이트 씨... 가기 싫어요."
그 말을 들은 화이트가 나에게 칼을 휘둘렀다. 가기 싫다고 한 건 라헬인데, 왜 내가 칼을 맞아야 하지? 이 상황이 너무 짜증났다.
나는 손에 신수강화를 하고 칼을 붙잡았다. 슬레이어의 칼을 맨손으로 잡는 건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피하거나 쳐낼 걸 그랬다. 새벽이라 정신이 어떻게 된 것 같았다. 칼이 내 손을 파고들면서 핏방울이 배어나왔다. 어깨가 떨렸다. 나는 손으로 칼을 통해 화이트에게 전기를 흘려보내려고 했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 검의 손잡이는 부도체란다."
"올라가서 유리 좀 불러와." 나는 라헬에게 거의 애원하듯이 말했다. 라헬은 쿵쾅거리면서 허겁지겁 윗층으로 뛰어올라갔다. 화이트가 내 손에서 칼을 빼면서 다시 휘둘렀다. 내 손에 있는 상처는 더 벌어졌고, 내 신발장도 화이트가 휘두른 칼에 박살이 났다. 마음이 아팠다. 화이트는 계속 정교한 검술로 날 몰아붙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라헬이 유리를 불러오기까지 2분도 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그 땐 그 시간이 정말 길게 느껴졌고, 난 실제로 여러번 죽을 뻔 했다.
내 샤워 가운만 걸친 유리가 급하게 계단을 뛰어내려와 화이트를 덮쳤다. 유리의 주먹이 화이트의 뒷통수를 여러번 내리찍었다. 그리고 곧 비올레도 내려와 화이트를 완전히 제압했다. 그렇게 모든 일은 끝났다. 아침에 나는 유리와 함께 병원에 다녀왔다. 그 뒤 유리는 라헬을 데리고 134층으로 떠났고, 비올레도 77층으로 갔다. 나에게 남은 건 다친 손과 부서진 신발장밖에 없었다. 나는 비올레가 헝클어뜨린 내 침대에 누웠다. 이불에서 차갑고 바삭바삭한 감촉이 느껴졌다. 만난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벌써 라헬이 보고 싶었다. 내일 134층으로 놀러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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