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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와 조나라의 초전부분
방훤(방난) 을 장수로 삼고 군대를 이끌고 연을 공격하여 여러 성읍을 빼앗자,
진은 연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왕전, 환의(환기), 양단화를 보내 조를 대대적으로 공격한다.
다른걸 봐볼까요
진나라는 명장 왕전과 양단화를 앞세워 조나라를 공격하는데, 이목과 사마상은 이번에도 꿈쩍도 하지 않고 수성에만 몰두하여 진을 지치게 하였다. 이목의 조나라는 난공불락이었다. 진나라의 이사는 선배 재상들이 써먹던 고전적인 수법을 다시 쓰기로 했다. 이는 이목을 제거하기 위해 유목왕이 총애하는 천하의 간신이자 매국노의 상징 곽개(郭開)를 또 다시 매수하는 작전이다. 곽개는 이 전쟁에서 자신이 득 될 것이 없다 생각하고 있던 차에 진의 반간계를 접하고는 망설임 없이 이목과 사마상이 모반을 꾀한다고 모함한다. 우매한 유목왕은 조총(趙葱)과 안취(顔聚)를 보내 이목과 사마상을 대신하게 하고, 거기에 이목까지 죽여 버렸다.
도대체 이런 한심한 지도자가 계속하여 버티고 있는 조나라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진의 장군 왕전은 즉시 조나라 군대를 쳐 조총을 죽이고 파죽지세로 수도 한단까지 밀고 들어가 유목왕을 포로로 잡아 하남 방릉(房陵)으로 유배시켰다. 결국 곽개도 조나라의 뜻있는 인사들에 의해 숨겨뒀던 재산 다 털리고 비참하게 암살당하게 된다. 조가 망한 것은 너무도 당연지사!
이로써 조나라는 할아버지 효성왕과 손자 유목왕이 진나라의 계략에 말려들어 3대에 걸쳐 미친 짓을 하다가 완전히 나라를 말아먹고 말았다(기원전 228년). 이에 조나라의 대신들은 전 태자 조가를 왕으로 옹립하고 대성 지방에서 항거했으나, 기원전 222년 진나라 군대에 의해 대성이 무너지고 대왕 조가는 항복했다.
대마불사의 신화, 강대국 조나라가 이렇게 멸망할 줄 아무도 몰랐다. 사가들은 조나라의 멸망시기를 실제로 유목왕이 잡혀 망한 기원전 228년으로 본다.
연대기를 살펴볼까요?
진시황 11년 (기원전 236년)[편집]11년, 왕전(王翦), 환기, 양단화가 업(鄴)을 공격하여 9개 성을 취했다. 왕전이 연여(閼與), 요양(橑楊)을 공격하여 하나의 군대로 통합했다. 왕전이 18일 동안 군사를 통솔하면서 녹봉이 100석 이하인 군사들 중 열에 여덟은 돌려보내고 둘만 남아 종군하게 했다.
업과 안양(安陽)을 취하여 환기가 군대를 통솔했다.
진시황 12년 (기원전 235년)[편집]12년, 문신후 여불위가 죽자 몰래 묻었다. 그의 가신으로 장례에 참가한 사람 중 진(晉)나라 출신은 추방했고, 진(秦)나라 출신으로 녹봉이 600석 이상인 자는 관직을 박탈하여 거주지를 옮기게 했으며, 녹봉이 500석 이하에 장례에 가지 않은 자들은 거주지만 옮기고 관직은 박탈하지 않았다.이때부터 국사를 나라 일을 처리할 때 노애나 여불위처럼 바른 길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일족을 모두 노비로 삼는 것을 관례로 정했다. 가을에 촉으로 옮긴 노애의 가신들의 세금과 요역을 면제했다. 당시 천하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6월부터 시작되어 8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비가 내렸다.
진시황 13년 (기원전 234년)[편집]13년, 환기가 조나라 평양을 공격하여 조나라 장군 호첩(扈輒)을 죽이고 10만 명의 목을 베었다. 진왕이 하남에 갔다. 정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10월, 환기가 조나라를 공격했다.
진시황 14년 (기원전 233년)[편집]14년, 평양에서 조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의안(宜安)을 빼앗고 깨부순 다음 그 장군을 죽였다. 환기가 평양, 무성(武城)을 평정했다. 한비자가 진나라에 사신으로 왔다. 진나라는 이사의 모략으로 한비자를 억류시켰고, 한비자는 운양(雲陽)에서 죽었다. 한나라 왕이 신하로 자청했다.
다른 연대기를 살펴볼까요?
시황제 11년(BC 236) : 장군 왕전(王翦)과 환의(桓齮), 양단화가 조나라의 업(鄴, 하북성 임장현 서남쪽)을 공격하여 9개 성을 점령하였다. 왕전이 연여(閼與, 산서성 화순현 서북쪽)와 요양(橑陽, 산서성 좌권현)을 공격하고, 환의가 업과 안양(安陽, 하남성 안양시)을 빼앗았다.
시황제 12년(BC 235) : 문신후(文信侯) 여불위가 진왕의 압박을 받고 죽었다.
조나라 토벌전을 일시 중지하고, 위(魏)와 연합해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시황제 13년(BC 234) : 삼진에 대한 총공세로 전환, 조나라 토벌전을 대대적으로 개시하였다.
장군 환의가 이끄는 진군(秦軍)이 평양(平陽, 하북성 임장현 서남쪽)을 공격하여 조장(趙將) 호첩(扈輒)을 죽이고,
조군(趙軍) 10만명의 목을 베었다. 진왕이 전시감독차 하남(河南)에 행차하였다.
진나라의 거듭된 공략으로 수도 한단성(邯鄲城)이 위태로와지자,
조왕(趙王)은 대(代, 하북성 울현) 지방의 수비대장 이목(李牧)을 소환시켜 방어에 임하도록 하였다.
시황제 14년(BC 233) : 진장(秦將) 환의가 평양과 무성(武城, 산동성 무성현 서북쪽)을 점령하였으나,
비성(肥城, 하북성 진현 서쪽)에서 이목의 요격을 받아 대패, 환의는 연나라로 도주했다.
한비(韓非)가 진나라에 건너왔으나, 이사의 계략으로 죽임당했다.
한왕(韓王)이 진나라의 번신(蕃臣)임을 자청, 완전한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시황제 15년(BC 232) : 진나라가 대군(大軍)을 일으켜 두 갈래로 나누어 조나라에 진격,
1군은 업성(鄴城)에 도착하고, 2군은 태원(太原)을 거쳐 낭맹(狼孟, 산서성 양곡현 서북쪽)을 빼앗았으며,
더 나아가 파오(番吾, 하북성 평산현 동쪽)를 공격하였다.
조장(趙將) 이목이 진군을 맞아 모두 격퇴시켰다.
이무렵, 조나라의 국력은 크게 소모되어 수십만 병사를 잃고, 한단을 지킬 따름이었다.
시황제 16년(BC 231) : 한왕이 남양(南陽, 하남성 서남쪽 일대)을 진나라에 바치자,
내사(內史) 등(騰)으로 하여금 그 영토를 접수, 한나라를 완전히 병합하기 위한 사전준비작업을 마쳤다.
위나라가 땅을 바쳤다.
이 해부터 3년간 천하에 기근이 들고, 조나라에선 대지진이 일어났다.
시황제 17년(BC 230) : '멸한국(滅韓國)' 진나라의 내사 등이 한(韓)의 수도 신정성(新鄭城, 하남성 신정시)으로 진격하여 국왕을 사로잡고,
영천군(穎川郡)을 설치하였다. 이로서, 한나라는 주(周) 왕실로부터 공인받은지 11대(代) 173년만에 멸망,
6국 가운데 최초로 병탄된 제후국이 되었다.
시황제 18년(BC 229) : 왕전(王翦)과 양단화, 강외(姜廆)가 이끄는 진군이 조나라를 대대적으로 공격,
상지(上地, 섬서성 수덕현)와 하내(河內)에서 각각 출발하였으며, 정경(井陘, 하북성 정경현)을 공격하고,
한단(邯鄲)을 포위했다. 조나라는 이목과 사마상(司馬尙)으로 하여금 진나라를 막게 하였다.
진나라의 이간계로 이목은 처형당하고, 사마상이 면직되었다.
시황제 19년(BC 228) : '멸조국(滅趙國)' 진장(秦將) 왕전과 강외가 동양(東陽, 하북성 태행산 동쪽 일대)을 빼앗고,
한단성을 마침내 함락시켜 조왕(趙王)을 사로잡아 군(郡)을 설치하였다. 이로서,
조나라는 주(周) 왕실로부터 공인받은지 10대(代) 175년만에 멸망했다.
조나라 공자 가(嘉)가 일족 수백명을 거느리고 대(代)로 달아나, 망명정권을 세웠다.
진왕(秦王)이 한단을 방문하였고, 태원(太原)과 상군(上郡)을 거쳐 돌아왔다.
시황제 20년(BC 227) : 형가(荊軻)의 진왕에 대한 암살미수사건 발생.
진나라는 배후주동자인 연(燕)나라 태자를 응징한다는 명분하에 왕전과 신승(辛勝)으로 하여금 토벌케 하였다. 진
군(秦軍)이 역수(易水)에서 연군(燕軍)을 대파하고, 그 도읍인 계(薊, 북경시)로 진격하였다.
시황제 21년(BC 226) : 장군 왕분(王賁)이 초나라를 공격하여 10여개 성을 빼앗았다.
연나라 토벌전에 군사를 증원하여 계성(薊城)을 함락시키고,
진장(秦將) 이신(李信)이 그 태자의 수급을 얻었다.
연왕(燕王)은 요동(遼東, 요녕성 요양시)으로 달아나 망명정권을 세웠다.
왕전(王翦)이 병을 핑계로 관직을 사임, 귀향하였다.
신정(新鄭)에서 한나라의 잔당세력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평정되었다.
시황제 22년(BC 225) : '멸위국(滅魏國)' 진장(秦將) 왕분(王賁)이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 하남성 개봉시)을 포위하여
3개월만에 수공(水攻)으로 함락시키고, 국왕을 사로잡아 군현을 설치했다.
이로서, 위나라는 주(周) 왕실로부터 공인받은지 8대(代) 178년만에 멸망했다.
위나라의 멸망으로 삼진(三晋)을 사실상 모두 평정했으니,
춘추(春秋)시대 패권국가였던 당진국(唐晋國)의 구(舊) 판도가 진(秦)의 영역에 편입된 것이다.
진장(秦將) 몽염(蒙恬)과 이신(李信)이 20여만 대군을 이끌고
초나라의 평여(平與, 하남성 평여현 북쪽)와 침(寢, 안휘성 임천현)을 각각 공격하여 초군을 격파했다.
성보(城父, 안휘성 박현 동남쪽)에서 초장(楚將) 항연(項燕)이 반격하여 이신의 군대를 대파,
진나라 도위(都尉) 7명을 죽였다.
시황제 23년(BC 224) : 진왕이 왕전(王翦)을 다시 기용하고, 60만 대군을 동원해 초나라에 대한 총공세를 시도하여 일거에 병합하고자 하였다.
진군이 평여와 진(陳, 하남성 회양현)을 함락시키고, 기(蘄, 안휘성 숙주시 동남쪽)에서 초군을 대파하여 항연을 죽였으며,
수춘성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진왕(秦王)이 전시감독차 진(陳)까지 행차하고, 군(郡)을 설치하였다.
시황제 24년(BC 223) : '멸초국(滅楚國)' 왕전의 군대가 수춘에 입성하고, 초왕(楚王)을 사로잡았으며,
강동(江東, 강소성)의 잔당세력들을 소탕하면서 오월(吳越)지방으로 진격했다.
이로서, 초나라는 웅역(熊繹)이 주성왕(周成王)으로부터 제후로 봉해진지 42대(代) 근 800년만에 멸망한 것이다.
강남의 평정으로 통일전쟁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시황제 25년(BC 222) : '멸연국(滅燕國)' 진장(秦將) 왕분(王賁)이 요동으로 진격해 연왕(燕王)을 사로잡아 그 나라를 완전히 병합하고,
군현을 설치하였다. 이로서, 연나라는 소공(召公)이 주무왕(周武王)으로부터 제후로 봉해진지 43대(代)만에 멸망했다.
왕분이 대(代)에 웅거한 조나라의 잔당을 소탕하였다.
왕전이 오월지방을 평정하고, 회계군(會稽郡)을 설치하였다.
천하에 대연회를 베풀었다.
시황제 26년(BC 221) : '멸제국(滅齊國)' 연나라를 평정한 왕분이 여세를 몰아 산동(山東)으로 진격,
임치(臨淄, 산동성 임치시)에 입성하여 제왕(齊王)을 사로잡았다. 이로서,
제나라는 전화(田和)가 찬탈해 주(周) 왕실로부터 제후로 공인받은지 8대(代) 165년만에 사직이 끊기고, 완전히 멸망하였다.
6국이 모두 평정되고, 천하가 진나라에 예속되었다.
이후 시황제는 조고에 의해 장기간 독에 노출되어 시찰중 중독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