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만화와 비교를 통해서 알아보는 니카라는 설정과 부족한 원피스의 서사 (부제: 작품을 이끌어가는 원동력 트라우마와 최종장에서의 인과율)
안녕하세요.
생각이 나면 틈틈이 원피스 연구 게시판에 글을 올리면서 소소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번 글은 사실 꽤 예전부터 적으려고 했었지만,
크게 내용이 정리가 되지 않았고, 시간이 많이 없다시피 해서 이렇게 미뤄지게 됐습니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연구를 적으려고 마음먹은 시점에서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이번에 제가 다루고 싶은 주제는
바로 루피의 최고 파워업 형태인 기어5 니카 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니카의 등장은 독자들에게 있어서도 굉장히 호불호가 갈립니다.
일단 많은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개연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대표적입니다.
저 역시 니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선이 많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개연성의 문제로 니카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원피스의 전체 서사적인 흐름에서 불만이 있습니다.
이번 글은 제가 가지고 있는 니카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원피스 서사를 통해서 풀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일단 원피스의 서사적 흐름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다른 만화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알아봐야 합니다.
무언가를 집중적으로 분석할 때, 비교를 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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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의 서사란?
2. 나루토의 서사
3. 블리치의 서사
4. 원피스의 서사
5. 추가된 원피스의 서사
6. 니카라는 설정
위는 목차입니다.
1. 작품에서의 서사란?
작품에서는 흔히 서사라는 것이 있고,
이 서사란 작품의 흥망성쇠를 좌지우지하는 만큼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본적으로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제작할 때, 반드시 인과관계를 구성합니다.
원인이 있어서 어떠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야기의 인물 즉, 주인공이 그 사건을 해결해 나가면서 일어나는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 하나의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표현하고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작가만의 전략이 있으며, 또 작가만의 특별한 기호가 존재합
니다.
보통 서사가 성공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작가의 전략이 독자들에게 통했으며 작가가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독자들에게 잘 전달됐다는 것을 뜻합니다.
반대로 서사가 나빴다고 한다면,
독자들은 제일 먼저 개연성에 의심을 품고 이렇게 진행되는 게 맞냐는 의문을 느끼며 최종적으로 망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럼 원피스의 서사는 어떨까요?
모두가 아시다시피, 원피스는 굉장히 직접적이고 단순한 만화입니다.
여기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는데, 단순하다는 것이 결코 나쁜 뜻은 아닙니다.
만화의 서사가 단순하다고 해서 그 과정까지 단순하리란 법은 없거든요.
그리고 그것마저 단순하다고 해서 독자들에게 아무런 여운을 주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단순한 것이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돼 서사의 무게감을 올릴 수도 있습니다.
원피스는 그 사례에 적절하게 부합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피스라는 만화는 주인공 루피가 해적왕이 되기 위해서 동료들을 모아서 모험을 떠나는 여행이라는 말로 그 서사를 압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이유가 궁금할 겁니다.
왜 루피는 해적왕이 되고 싶어 하는가?
왜 루피는 동료들을 모으려고 하는가?
어찌 보면 단순할 수 있는 물음들이 서사에서는 꽤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이러한 물음들이 작품의 개연성을 채워주는 것이기 때문이죠.
루피가 해적왕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원피스 배경 설정인 해적왕이 남긴 보물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작중에서 처음 등장한, 주인공 루피의 나이는 7살의 어린 소년입니다.
어린 소년이 해적왕이 남긴 막대한 보물에 로망을 느끼고 꿈을 품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평범한 설정이죠.
그리고 루피가 동료들을 모으려고 하는 이유는
자신이 동경한 빨간머리 샹크스의 해적단에 지지 않을 동료들을 모아서 원피스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원피스는 시작 당시에 아주 단순한 서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 개연성도 충분한 만화였습니다.
하지만
원피스는 다른 스토리들과 차별화된 부분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 다른 주요 만화들과 비교를 하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2. 나루토의 서사
비교를 통해서 확실하게 알아보기 위해서 첫 번째로 소년만화 나루토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작품 시작 당시,
주인공인 나루토는 남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기행을 계속 저지르고 있는 마을의 문제아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행을 저지르면서 남들은 하지 못하는 일을 자기는 할 수 있다는 묘한 우월감에 빠져 있기도 하는 등
다른 사람이 바라보기에 나루토는 미성숙하고 모자란 아이였습니다.
한 마디로 그냥 관종일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행이 사실은 나루토의 심적 고뇌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등
작가는 이런 나루토의 기행이 단순히 모자라고 미성숙해서 나온 행동이 아닌
인간 본연의 감정에서 발현된 자가 신호 중 하나라는 뉘앙스를 묘사했습니다.
바로 쓸쓸함과 외로움이라는 인간 본연의 감정 말이죠.
이런 나루토의 서사에 방점을 찍은 건 바로 호카게가 되고 싶다는 나루토의 꿈이었습니다.
호카게란 마을에서 최고의 닌자를 뜻하는 칭호이자 직책입니다.
하지만 나루토는 단순히 고위직이라서, 최고로 강한 닌자라는 수식어 때문에 호카게가 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이었습니다.
그건 바로 지금까지 나루토가 벌여왔던 기행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나루토가 결핍했던 부분과 이루고자 했던 것이 정확히 일치하는 순간이기도 했죠.
나루토는 어렸을 적, 모종의 이유로 부모님을 잃었고 본인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으며 심지어 부모님이 누군지조차 모르고 있었
습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 어린 나이에 혼자 고독하게 자라오면서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감정이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발현된 것이죠.
단순히 외롭게 지낸 것만이 아니라 나루토는 그 어린 나이에 모두에게 멸시받고 차별받는 존재였습니다
.
멸시와 차별은 성숙한 어른이 견뎌내기에도 상당한 고통이 수반되는데,
나루토 같은 미성숙한 아이가 견디기에는 지독하게 힘들었을 겁니다.
즉,
나루토의 서사에서 주인공 나루토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바로 트라우마입니다.
나루토는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이겨내려고 하는 소년만화의 주인공이었죠.
그리고 그런 나루토의 트라우마는
페인전 당시, 나가토를 회유하고 나뭇잎 마을을 끝끝내 항전해서 지켜낸 나루토가 모두에게 인정받고 영웅이 되므로 극복됐습니다.
하나의 서사에서 주인공이 가지고 있었던 트라우마가 극복되고 그 트라우마로 인해서 생겨났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서사는 끝나고 하나의 잘 버무려진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나루토는 이제 잘 만들어진 하나의 이야기이니까 여기서 끝나도 되는 건가요? 라는 궁금증이 생기실 겁니다.
때에 따라 다르지만, 나루토의 경우 답은 NO입니다.
주인공인 나루토의 트라우마가 극복되고 마을의 영웅이 됐지만
그와 동시에 작가는 바로 다음 장면에 사스케를 묘사함으로 이 이야기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암시했습니다.
페인전이라는 이야기까지 만화 나루토를 이끌었던 원동력은 바로 주인공 나루토의 트라우마입니다.
그리고 페인전 이후로 만화 나루토를 이끌어간 원동력은 바로 주인공과 대척점에 있었던 사스케의 트라우마입니다.
나루토라는 서사에서 작가가 전달하고 싶었던 주제는 감정의 연쇄작용입니다.
애정이 생기면 그 애정이 증오를 애정으로 바꿔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독자들에게 계속 던져왔습니다.
애정에 목말랐던 주인공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면서 애정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아이에게 이번에는 애정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나루토와 사스케의 이야기입니다.
사스케는 만화 나루토에서 또 다른 주인공입니다.
주인공 나루토처럼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고, 그 트라우마는 나루토와 똑같았습니다.
애정했던 형의 배신과 탈주 그리고 가족을 비롯한 일족의 죽음은 사스케를 순식간에 고독한 아이로 만들어버렸죠.
다만 차이점이 있었다면,
나루토는 그런 쓸쓸함과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기행을 일삼았고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꿈을 마음속에 키워갔습니다.
하지만 반면에 사스케는 그런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나약한 짓이라고 간주하는 외로운 늑대처럼 행동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사스케의 진짜 속마음을 알아차린 나루토가 계속해서 반항하고 튕겨 나가는 사스케를 회유하는 내용이 페인전 이후의 나루토입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나루토라는 이야기 자체가 유치한 어린아이들의 심술이라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주인공 나루토가 호카게가 되려고 했던 이유와 사스케가 나뭇잎 마을을 멸망시키고 현재의 오카게를 처형하려는 이유 자체가 단순히 자기가 외롭고 쓸쓸해
서 그랬다는 것이 납득하기가 쉽지 않겠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맞습니다.
이러한 나루토와 사스케의 이야기는 모두 그들이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단순한 어린아이가 아니라 지독하게 마음에 병이 든 어린아이였던 거죠.
마음의 어딘가가 결핍이 된 상태에서 필요 이상의 힘을 갖추게 된 어린아이가 어디까지 폭주하고 행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이야기가
만화 나루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라우마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트라우마를 고치고 다른 사람의 트라우마까지 치료해준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의 소년만화이죠.
3. 블리치의 서사
다음으로 비교해볼 작품은 원피스 나루토와 동시대를 향유했던 만화 블리치입니다.
블리치의 서사는 모든 인간이 가장 쉽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만국 공통의 애정인 가족애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원피스의 루피처럼, 나루토의 나루토처럼 블리치의 주인공 이치고는 원대한 꿈을 가진 소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처럼 천진난만하지도 않았고, 순수하지도 않았으며 어딘가 고독을 즐기는 듯한 중2병 가득한 소년 같았죠.
어떻게 보면 소년 같아 보이지 않는 소년이었습니다.
보통 이런 캐릭터들은 공감하기가 어렵고 거리감이 느껴져서 독자들이 쉽게 작품에 몰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블리치는 그 모든 것을 가족애라는 전략으로 극복해나갔습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강해지기 위해서도 아닌
단순히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가 바로 이치고가 사신이 된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초반 블리치의 서사에는 가족애와 관련된 스토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얼떨결에 사신 대행을 맡게 된 이치고가 사신의 일에 진심이게 된 이유에 개연성을 붙인 것이라고 할 수 있죠.
가족과 관련된 일로 고통받는 인간과 호로의 일을 목격한 이치고는 눈을 돌릴 수가 없었고 결국 사신에 진심이 된 것입니다.
이치고의 가족애를 부각한 이유는 바로 이치고가 그 가족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소년이었기 때문입니다.
블리치의 서사도 나루토의 서사와 비슷합니다.
바로 주인공 이치고도 사실은 마음속에 큰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소년이었습니다.
그 트라우마는 바로 엄마의 죽음입니다
설정상, 이치고의 엄마는 이치고 가족들 사이에서 구심점 역할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였던 것이죠.
그런 어머니가 이치고가 어린 나이에 죽었던 걸로도 이미 감당하기 힘든 슬픔인데도,
거기에 더해서 이치고는 그런 엄마가 자기를 구하려다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기가 어머니를 끌어내렸다고 하는 죄책감을 가지
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죄책감을 용서받고 싶어 하는 심리가 가족들 모두를 자신이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변화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치고는 사신이 되려고 했을 때,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받아들인 것이었고요.
이처럼 주인공 이치고의 트라우마는 블리치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애는 루키아에 대한 보은이 버무려지면서 소울소사이어티 편이 진행됐고,
다시 그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마지막 에피소드인 천년혈전편으로 이어지게 되죠.
4. 원피스의 서사
다시 이제 원피스로 돌아와 보면, 원피스와 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 보일 것입니다.
사실 사례를 압축해서 나루토와 블리치만 예시로 들었지만, 대부분의 소년만화는 비슷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사를 풀어나갈 때, 이야기의 중심적 인물이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작품을 진행해나가면서 포기하고 쓰러지지 않는
주인공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건 소년만화의 정석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인공이 모든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현실에 좌절하고 무너지면서 시궁창 같은 현실을 보여줄 때도 있지만, 이런 모습들은 소년만화라는 장르에서는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어떤 이야기든 트라우마라는 소재로 작품을 진행하는 것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받을 만한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완벽하지 않고 모두가 흠을 가지고 있고, 내면에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가장 공감할만한 소재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이죠.
반면에, 이제부터 알아볼 원피스라는 만화에서는
이러한 서사가 비교적 많이 약합니다 .
원피스의 시작 당시, 주인공인 루피에게는 마땅히 트라우마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죠.
이렇게 말하면 루피에게는 샹크스라는 트라우마가 있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루피와 샹크스의 이야기는 트라우마라고 보기에 사실 그 힘이 많이 약합니다.
왜냐하면 샹크스는 죽지 않았기 때문이죠.
만약 샹크스가 루피를 구하기 위해서 죽었다면, 이것은 분명히 트라우마이고 루피를 움직일 수 있는 매우 큰 원동력입니다.
하지만 샹크스는 죽지 않았습니다.
보통 트라우마라고 한다면, 어떤 인물에게 있어서 매우 비극적이며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매우 지독한 고통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심할 경우에는, 블리치에서 이치고처럼 자기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고 강박관념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와 똑같은 일을 다시 겪지 않으려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루피에게 있어서 샹크스의 이야기는 떠올리기 싫은 지독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루피에게 있어 샹크스의 이야기는 희망찬 이야기입니다.
자기가 동경했던 위대한 사나이가 자신과의 재회를 약속하며 자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원피스에서 루피는 샹크스를 매우 그리워하고 샹크스와의 만남을 고대합니다.
신세계에 들어가기 직전에도, 루피는 샹크스가 있는 바다라면서 샹크스와의 이야기를 떠올렸고,
와노쿠니 당시에는 샹크스의 패기를 느낀 것만으로도 샹크스의 얼굴을 떠올릴 만큼
루피에게 있어서 샹크스와의 이야기는 트라우마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서사에서 주인공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힘은 어떤 일에 대한 트라우마이고,
주인공이 하고자 하는 일이 그 트라우마와 관련된 일이라면 독자들은 더욱 공감하고 몰입을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원피스에서 루피가 해적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게 언급이 되지 않고 작품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개연성을 추가하기 위해서 샹크스와의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남자와 남자끼리의 약속이라는 로망이죠.
사실 트라우마가 없다고 해서 주인공이 행동하는 데에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원피스라는 장기 만화 연재에 있어서 그 힘이 다소 약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죠.
한두 개 에피소드에서는 루피와 샹크스의 이야기가 원동력이 돼서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에피소드를 이끌어가기에는 분명히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독자가 쉽게 공감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죠.
왜 이렇게까지 해적이 되려고 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리고 트라우마가 없다는 것은 극복해나가는 것이 없다는 뜻이고
이는 바꿔 말하면, 작품에서 주인공이 극복할 만한 요소가 없다는 뜻이고 정신적인 성장이 없다는 것이 됩니다.
5. 추가된 원피스의 서사
원피스라는 서사에서 주인공의 행동에는 그 개연성이 많이 부족합니다.
나루토와 블리치에서는 잘 들어보지 못했지만, 우리가 원피스에서 자주 들어본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루피가 정박아라는 말입니다.
물론 일종의 밈이지만 단순히 웃자고 한다는 소리로 치부하기에는 조심스럽죠.
주인공 루피가 정박아라는 소리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독자들이 루피의 행동에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루피는 해적이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의 행동은 해적과는 많이 거리가 있습니다.
물론 소년만화이기 때문에 단순히 모험과 여행을 해적이라는 기호로 표현한 서사의 일종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루피의 행동은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모호합니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에는 마땅히 이유가 없습니다.
사실 이것들이 가장 큰 문제인 것은 작품을 관통하는 서사에서 개연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루피라는 주인공을 움직이게 하고, 작품을 꿰뚫는 서사가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원피스의 작가인 오다도 그것을 인지했는지, 루피에게 또 다른 서사를 추가합니다.
그것이 바로 삼 형제 이야기죠.
이 삼 형제 이야기는 원피스 정상 결전이 끝나고 난 직후, 1부의 막바지에서야 언급이 됩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원피스라는 서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주인공인 루피가 해적이 되고자 했던 이유가 조금 더 명확하게 풀어지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죠.
따라서 스토리 초반부에 나와도 전혀 이상한 것 없는 이야기였지만,
왜인지 원피스에서는 꽤 뒤늦은 원피스 59권에서 시작됩니다.
이들은 서로 형제의 잔을 나누면서
서로의 꿈을 외치고 그 꿈을 이루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났죠.
바로 의형제이자 꿈을 약속했던 사보의 죽음이었습니다.
사보의 죽음은 에이스와 루피의 신념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그들이 꿈을 절대 포기하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사보의 죽음으로 인해서 에이스와 루피는 인생을 후회 없이 살자는 모토가 생겼고
에이스는 이제 자신만이 형이라는 위치에서 루피를 돌볼 수 있다는 책임강을 형성하게 했고,
루피는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자가 되겠다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사보의 죽음이 루피와 에이스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한 것이죠.
즉,
개연성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루피가 왜 해적왕이 되려고 하고, 이 바다에서 가장 자유로운 자를 해적왕이라고 말하였는지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문제는 그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겁니다.
정리하자면,
루피는 59권 이전까지 즉, 정살 결전 에피소드 이전까지는 샹크스와의 약속을 동기부여로 모험을 진행하고 있었고
그 이후로는 형제의 약속이 추가돼 루피의 꿈에 더욱 목적성을 부여한 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인공의 행동에 필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사보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까지 넣어서
원피스도 다른 작품처럼 트라우마를 극복해나가는 주인공의 서사를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죽은 줄 알았던 사보가 살아있던 것이죠.
사보의 죽음은 에이스와 루피를 살아가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보가 사실 살아있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기분 좋은 소식이지만,
서사적으로 본다면 어딘가 나사 빠지게 된 모양이 돼버린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부분이라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보는 살아 돌아왔지만, 에이스는 죽었기 때문이죠.
루피가 계속 모험하고 항해하는 이유가
자기를 구하려 하다가 죽은 에이스의 의지를 잇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서사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뿐,
원피스라는 주제 의식과 보다 더 원초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됩니다.
일단 살아있는 에이스의 의지라는 표현이 너무 관념적이며 독자들에게 절실히 와닿지가 않죠.
그리고 원피스의 핵심적인 주제인 자유와 자유의지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루피는 루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에이스의 삶을 살아간다는 표현이 되기 때문에 이 역시 매우 이질적입니다.
어떤 식으로 해석을 하든, 루피의 자유의지 측면에서 본다면 아쉬운 게 많은 부분이죠.
하지만 사실 루피에게도 루피를 움직이는 마지막 원동력이 하나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루피의 마지막 꿈의 끝입니다.
사실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치로도 작가이고, 자신만의 작품을 대히트시킨 엄청난 실력을 갖춘 작가입니다.
그러니 오다 또한 이런 점을 분명히 알고 있을 겁니다.
원피스 중반부에서 사실 루피의 꿈이 하나 더 있었고, 최종 장으로 넘어온 지금에서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설정을 추가한 것은
이 꿈의 끝이야말로 루피를 움직이는 진정한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원피스를 보는 독자들이라면 꽤 당혹해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루피의 꿈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해적왕이었는데, 갑자기 무슨 꿈이 더 있다는 거고 그걸 왜 독자들에게 숨기는 거지? 라는 부분에서 말이죠.
순차적으로 정리를 해본다면,
샹크스와의 이야기 - 삼 형제 이야기 - 루피의 꿈의 끝
이 세 가지가 전부 버무려진 것이 루피의 서사라는 것입니다.
원피스의 작가 오다도 서사에 개연성과 힘을 부여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추가를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위에서 설명했고, 지금까지 설명했던 것처럼 루피가 움직이는 동기가 매우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뒤에 삼 형제 이야기와 꿈의 끝이 아직 스토리 진행이 되지 않았을 때,
샹크스의 이야기만 가지고 시작된 원피스의 이야기는 꽤 가벼우면서도 서사적인 힘이 매우 약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모험으로 시작한 여행이 어느새 세계정부라는 거대한 단체와 엮이게 되면서 대의를 위한 여행이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죠.
스케일은 커지고 있는데, 주인공의 동기가 그에 비해서 너무 작고 가진 힘이 약하기 때문에 서사적으로 강화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물며 말씀드린 것처럼, 샹크스라는 인물이 버젓이 살아있기 때문에 서사적인 힘이 다른 만화에 비해서 더욱 떨어지는 것이죠.
서사적인 힘이 약하다는 말은 독자들이 쉽게 몰입을 하기 힘들고 공감하지 못한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원피스의 시작 당시에는 주인공 루피의 꿈이 해적왕이고, 그 동기는 샹크스와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하면 이상할 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해적왕이라는 설정이 구체적으로 나오지도 않았고, 얼마나 험난한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묘사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점점 등장하는 삼대 세력, 칠무해와 해군본부 대장들 그리고 바다의 황제라고 불리는 사황이라는 점점 커지는 스케일에서
이제 독자들은 해적왕이라는 단어에 대한 무게감을 이해하기 시작하죠.
그렇기 때문에, 샹크스와의 약속 하나 때문에 그 험난한 여정을 가는 것에서 개연성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주인공의 서사를 강화하는 쪽으로 모색을 할 수밖
에 없죠.
그리고 이제 최종 장에서 원피스는 루피가 세계정부와의 마찰을 피할 수가 없는 사태까지 왔습니다.
즉,
설정을 강화하고 세계관을 확장하면 확장할수록 그와 동시에 주인공의 서사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적은 세계정부 아니면 검은 수염입니다.
그렇다면 루피의 꿈의 끝은 이 세계정부와 검은 수염쪽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죠.
그래야만 주인공이 세계정부와 싸우는 것에 개연성을 부여할 수 있으니까요.
만약 꿈의 끝이 세계정부나 검은수염과 관련이 없다면,
애초에 꿈의 끝이라는 단어가 나올 일도 없고, 작가가 이렇게까지 갑자기 최후반부에 와서 독자들에게 상기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작품에서는 처음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과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주인공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목표를 방해하는 세력이 있어야 하죠.
루피의 꿈의 끝이라는 단어는 최종장에서 루피의 싸움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작가가 마련한 서사적인 장치인것입니다.
6. 니카라는 설정
원피스에서 주인공인 루피의 성격을 보면 사실 그렇게까지 큰 정의감을 가진 인물은 아닙니다.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을 하면 안 되는 행동인지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대의를 위해서 이용하는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루피가 지금까지 적들과 싸운 이유는 매우 단순합니다.
그냥 자기 친구를 울렸거나, 굶겼거나, 학대했거나 그런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루피다운 이유였죠.
그리고 루피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간에 하나하나 끼어들어서 해결을 하려고 하는 해결사적인 성격도 아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억압받는 나라를 구하는 영웅이 되고 싶어 하는 성격도 아니었고요.
그저 친구가 자기를 도와달라고 할 때, 도와주는 소년이었습니다.
루피는 모든 일을 그렇게 도와왔죠.
항상 상대의 의사를 먼저 물어보고,
너가 내 친구라서 나는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너를 도와도 되겠니? 너가 직접 의사를 밝혀라 라고 언질을 하는 것이 루피의 대화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체 이런 성격을 가진 루피가 어떻게 세계정부와 엮여서 마지막 대전쟁을 하게 될까?
원피스에서는 공백의 100년이라는 설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직 정확히 무엇인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언급되는 뉘앙스와 단편적인 이야기들로만 보아서는
현재 세계정부의 추악한 이면일 확률이 제일 높습니다.
하지만 로빈의 도움으로 어찌어찌해서 공백의 100년을 전부 알게 됐을 때,
루피가 이런 세계정부의 추악한 이면들을 전부 알았다고 해서 과연 세계정부와 싸우려고 할지에 대해서 의문이 있었습니다.
루피는 세계가 잘못됐다고 해서 바로 잡으려고 정의감을 불태우는 착실한 소년이 아닙니다.
그저 본능에 충실하고 자기 친구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따뜻한 소년일 뿐이죠.
하지만 원피스는 최종 장으로 진입했고,
루피는 어떻게 해서든 이제 세계정부와 싸워야만 합니다.
이 싸움은 결코 피할 수가 없는 싸움입니다.
1부 피날레 당시,
흰수염이 언급한 수백 년간의 역사를 전부 짊어지고 세계정부에 도전할 자가 나타난다는 언급이 있었던 것처럼
루피는 모든 것을 짊어지고 세계정부와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계기가 불분명하다는 거죠.
왜냐하면 루피는 그런 성격이 아니니까요.
몇몇 가설에서는 그 이유가 비비때문일거라고 많이 추측들을 하고 있습니다.
비비가 세계정부에게 목숨을 위협받거나 생포돼서 루피가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세계정부와 싸운다는 것이죠.
충분히 일리가 있고 루피 성격이라면 이쪽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거창한 대의를 위해서보다는 자기의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싸우는 쪽이 루피 답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에피소드 하나일 때의 이야기입니다.
루피가 세계정부와 싸우는 것은 원피스라는 만화에 있어서 최종장이고 마지막 거대한 대전쟁입니다.
동료를 구하기 위한 싸움은 에피소드 하나를 끌어갈 원동력은 충분히 되고 그럴만한 힘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종장을 이끌어 나갈 원동력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최종장이란 말 그대로 작품 서사 자체를 끝내는 단계이자, 클라이맥스입니다.
모든것을 하나로 모아서 관통하여 한 번에 터뜨리는 최고조이죠.
지금까지 에피스도와는 비교도 안 될만큼 복잡해야 하고, 그 과정 또한 매우 치밀해야 하며, 결과 또한 매우 엄청나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흩어져 있는 점들이 하나로 모여서 끝을 내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최종장에서의 인과관계의 시작이 비비를 구출하는 것은 그 시작이 다소 약합니다.
쉽게 말해서, 임팩트가 부족하다는 것이죠.
원피스는 이미 스케일이 커질 대로 커져 버린 만화이기 때문에, 인과관계 또한 결코 작을 수가 없습니다.
비비를 구하기 위해서 세계정부와 싸운다는 것은 그저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이지, 최종장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모양이 빠집니다.
최종장은 지금까지 와는 전혀 달라야 하고 새로워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피가 세계정부와 왜 싸우고 전쟁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서사를 완성해줄 만한 커다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치로는
이 커다란 최종장의 인과율의 시작 지점을 니카로 설정한 겁니다.
조금 더 과격한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냥 니카로 때웠다고 할 수 있죠.
니카와 조이보이 그리고 이무. 이 삼박자에 의해서 루피는 세계정부와 싸울 수밖에 없는 흐름으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운명론입니다.
루피가 그럴 생각이 없어도 이들은 싸우도록 설계된 운명이라는 겁니다.
참으로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해답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나루토에서 나온 거죠.
바로 인드라와 아수라입니다.
인드라와 아수라라는 운명에 얽힌 나루토와 사스케가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러한 운명론과 신의 설정은 비단 나루토에서만 사용한 것은 아닙니다.
대다수의 작품들이 항상 최종장에서 신 그리고 환생 마지막으로 운명론을 합쳐서 작품을 마무리 짓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명쾌하기 때문이죠.
싸울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가장 확실하게 개연성이 부여되고 싸움에 정당성이 생기는 겁니다.
반면에, 독자들은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들도 이러한 독자들의 불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줄기차게 이 소재가 사용되는 이유는 가장 확실하고 명쾌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커져 버릴 대로 커져 버린 이야기에서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기연재 만화일수록 이 부분은 문제가 더 심각해지는데, 이미 스토리는 매우 커져 버렸기 때문에 단순한 주인공의 행동으로는 개연성이 채워지지 않는 것
이죠.
하지만 사실 이들이 전생에 연이 있었고, 전생에 서로 싸웠던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게 현재까지 이어져서 싸운다고 한들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꽤 무책임한 행동이면서도 안타까운 겁니다.
이것 말고는 이미 커져 버린 스케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이니까요.
하지만 원피스와 나루토는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나루토와 사스케의 싸움에는 이미 커다란 개연성과 정당성이 작품 내에 있었고 꾸준히 묘사가 있었습니다.
트라우마를 가진 소년이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같은 트라우마를 가진 친구도 극복을 시켜준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소년배틀물이라는 장르답게 싸움으로 표현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죠.
다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최종장은 임팩트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간의 여행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인과율이 존재해야만 하고 하나로 관통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나루토의 작가 키시모토 마사시는
그것을 최대한 극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인드라와 아수라라는 개념을 투입시키고 전생이라는 개념을 구사한 것이죠.
독자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뜬금없기야 하겠지만요.
나루토와 사스케는 원래도 싸워야만 했지만, 전생에 싸웠던 인연이었던 만큼 그들의 싸움에 더욱더 정당성이 강화되는 것이죠.
그야말로 최종장에 알맞은 인과율이죠.
하지만 원피스는 다릅니다.
나루토가 나루토와 사스케의 싸움에 정당성을 더욱 강화시키고 최종장에 맞게 인과율을 극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시도로 신과 전생이라는 개념을 차용했
다면,
원피스는 아예 그 시작을 그냥 신과 전생으로 막을 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카라는 설정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 원피스에서는 그 어디에도 루피가 조이보이와 동일 인물일 것이라는 뉘앙스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원피스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죠.
원피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의 꿈과 계승되는 의지 그리고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시대의 일렁임이었습니다.
사보는 죽었어도 에이스와 루피가 그 의지를 이었고, 에이스는 죽었어도 루피와 사보가 그 의지를 이었으며
로저는 죽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의지를 이어서 저마다의 답을 찾으려고 해적이 된 것처럼
원피스는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끝이 나는 게 아니라 그 의지를 잇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완전한 소멸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원피스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었습니다.
때문에, 조이보이가 있었어도 그 의지를 이은 자가 루피일 것이라고 모두가 생각했던 것처럼
루피를 조이보이 나아가서는 태양신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니. 없었다기보다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거겠죠.
그건 원피스와 맞지 않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원피스는 전생이라는 개념과 어울리지 않았고 신과도 어울리지 않았고 더욱이 신을 부정하는 만화에 가까웠습니다.
하늘섬 에피소드에서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신의 이름을 부여하며 신이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샨도라 일족을 은연중에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과 공포가 일개 뱀을 신으로 모시게 했고, 그들의 그런 악습은 결국에 노랜드에 의해서 타파됐습니다.
낡은 계율이야말로 악령이라는 대사로 말이죠.
하늘섬 에피소드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줄곧 하나였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에 신 같은 건 없으며 공포와 무지가 만들어낸 악령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었죠.
그리고 오다는 세계정부의 중추적 인물인 천룡인들을 신으로 표현하고 그것에 대항하는 D의 일족을 신의 천적이라고 표현하는 등
원피스에 있어서 신이라는 단어는 결코 좋은 표현으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하늘섬 에피소드에서 신이라는 단어는 낡은 계율이었으며,
천룡인들을 상징하는 신은 썩어버린 권력의 폭주였을 뿐입니다.
하지만 와노쿠니 편 이후에 등장한 신이라는 개념은 지금까지의 원피스와는 매우 이질적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이미지가 매우 강한 편이죠.
루피가 조이보이이고 니카여서 세계정부와 싸운다.
개연성에 문제는 있을지라도, 싸움에 있어서 정당성은 이미 확보가 된 셈입니다. 참으로 편하게 말이죠.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개연성을 포기하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니카라는 설정을 사용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최종장에서는 무엇보다 인과율이 매우 중요하니까요.
사실 루피가 D의 일족이고 신의 천적이기 때문에 세계정부와 싸운다 만으로 충분히 정당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정부 전체와 싸울 만큼의 커다란 대의를 가지기 위한 힘에서는 많이 부족하죠.
원피스의 작가 오다 에이치로는 그러한 정당성을 완벽하게 부여하기 위해서 니카라는 개념을 사용했지 않을까 합니다.
D의 일족인 루피가 조이보이와 니카의 의지로 세계정부와 마지막 싸움을 한다는 것.
이것 하나면 그야말로 최종 에피소드를 표현하기에는 충분하니까요.
여러 가지 면에서 본다면,
니카라는 설정의 등장은 많이 실망스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원피스의 주요 관전 포인트는 루피가 어떠한 계기로 세계정부와 싸움을 할 까라는 그 인과율이었는데,
작가는 그 이유를 운명론으로 적당히 해결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도 저는 루피의 자유의지가 강하고, 원피스라는 만화가 자유를 표방하는 만큼
최종장에서 운명을 짊어지고 세계졍부와 싸우려는 니카의 의지와
단순히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 혹은 루피다운 이유로 세계정부와 싸움을 하려는 루피의 의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심적으로 루피의 자유의지와 니카의 의지가 서로 부딪히며 싸우는 것이죠.
그리고 최종적으로 루피의 자유의지가 이기면서 원피스다운 만화로 세계정부한테 싸움을 걸러가는 루피의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루피 답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