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침묵 : 한용운 시. 표제시
님의 침묵 : 한용운 시. 표제시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
ⓖ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얐습니다.
ⓙ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감상 : 슬픔을 희망으로 역전시켜 이별을 만남의 희망으로 바꾼 구조가 주제의 형상화에 기여하고 있다. 즉 헤어짐은 만남의 전제 조건이라는 역설적 진리가 이 시의 주제 의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