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토의 시(1956) : 구상 시
초토의 시(1956) : 구상 시
<초토(焦土)의 시> 8
--- 적군묘지(敵軍墓地)앞에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구나. //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 바른 두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욱 신비스러운 것이로다. //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30리면
가로 막히고
무인공산(無人空山)의 적막(寂寞)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어 있도다. //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으로 흘러 가고, //
어디서 울려오는 포성(砲聲)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
· 무주공산 : 주인 없는 쓸쓸한 한
· 은원 : 은혜, 원망
* 감상 : 구상의 연작시 15편(연작시 형태의 첫작품) 중 제8수이다.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을 배경으로 한 시로서 적군 묘지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사랑과 화해로 민족의 동질성의 회복과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다. 적대의식이나 증오보다는 동포애와 인간애로부터 우러나오는 관용과 연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생사를 가름하며 서로 총을 겨누던 사이였으나 한 발짝 물러나면 원한, 저주가 아닌 분단의 갈등 속에 찢겨진 동족의 연민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