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화 카네키 각성씬 관련 해석거리
이번화에서 사용된 연출 중에는, 그동안의 모든 카네키들이 마치 별개의 인물처럼 독립된 자아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있었습니다. 각각의 카네키는 당시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대변하며, 때문에 약간 극단적인 면모를 보이는데, 덕분인지 서로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지요.
이 연출에 정확히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선 아마 조금 시간을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몇가지 상당히 노골적인 비유가 사용된 관계로 미흡하게나마 적어두고자 합니다. 주목할 부분은, 이들의 숫자가 항상 7명으로 유지된다는 점입니다.
7명의 카네키를 가장 쉽게, 또 가장 처음으로 눈치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장면.
보시다시피 현실의 빈사 상태가 된 카네키의 육체 주변으로 총 7명의 카네키가 둥글게 모여듭니다.
천장에 떠오른 체크무늬는 천국과 영혼의 세상을 의미. 일반적으로는 죽음을 나타내지만, 어머니의 자궁에 대한 비유로도 사용되어 "아이의 잉태", 즉 출산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곳에 있었던 카네키는 누군가의 '태아'라고 볼 수 있다.
이후 토우카 이야기로 열을 올리는 장면에서도 말풍선의 개수는 계속 7개로 이어지게 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죠.
물론 본인들도 인정하다시피 결국 하나의 카네키 켄이라는 초자아겠으나, 연출로서나마 현재 카네키 켄 내면에 7인분의 자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던 부분들입니다. 후루타 역시 이 점을 방증하듯이 "무수한 양의 카네키 켄이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지요.
(후루타의 표현을 빌려) 현재 카네키의 상태를 요약해보자면 '7개의 자아를 가진 어린 용' 즈음이 되는데, 실은 이 부분은 성경의 영향을 받은 소재로, 실제로 성경에서는 마찬가지로 7개의 머리를 가진 용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는군요.
여기서 각각의 머리는 서로 싸우기도 하는 등, 독립적으로 움직이며 온갖 불경한 말들을 내뱉는데, 하나하나가 극단적인 죄악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머리'라는 것이 개인의 '의식'을 담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앞서 언급된 카네키의 일곱 자아는 이 괴물의 일곱 머리에 비유될 수 있을 법한 일이죠.
불경한 삼위일체 ; 좌측부터 거짓 선지자(대적하는 자의 영), 붉은 용(대적하는 자의 신), 짐승(대적하는 자의 예수 그리스도).
구울이 인간을 대적하는 위치에 놓여 있음을 상기해보자. 이들은 '누구'의 '무엇'이 되는가?
성경에서 언급되는 7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은 총 두 종류가 있습니다. 바로 에덴 동산의 뱀이기도 한 '붉은 용'과, 그 아들인 '짐승' 입니다.
짐승은 자신의 아버지(붉은 용)를 놀라울 정도로 닮아서, 아버지의 힘과 권능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때문에 실제로 짐승은 그 자체로 또다른 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는 마치 신의 아들인 예수를 또다른 신으로 추앙하는 것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붉은 용과 짐승의 이야기는 굉장히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때문에 둘을 구분하는 것은 웬만해서는 어려운 일입니다만,
- 후루타가 카네키를 '아이', 정확히는 '어린 용'이라고 표현한 점,
- 성서에서 붉은 용은 지하를 통치하며, 짐승은 그 용에게서 지상을 통치할 권한을 받았다고 기록(나가라자는 지하를, 카네키는 지상을 파괴.)되는 점,
-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관계가 카네키와 후루타의 관계와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보았을 때, 아마 카네키는 아들 쪽인 짐승의 포지션에 해당하지 않나 싶습니다. 실제로 짐승은 삼위일체의 성자, 즉 예수에 대응하는 위치로, 카네키가 가진 예수로서의 포지션은 작품 내외적으로 꾸준히 암시되어온 바 있었죠. 뿐만 아니라 용에게 '죽이려고 하는 여인'이 있는 것과는 달리, 짐승에게는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여인(대탕녀 바빌론)'이 있으며, 이는 작중의 토우카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겠습니다.
거짓 선지자와의 관계 역시 주목할 법 합니다. 거짓 선지자는 잘생긴 외모와 훌륭한 리더쉽으로 만민의 사랑을 받는 매력적인 남성으로 묘사 되곤 하는데, 추한 외모를 가졌고 우둔하지만 그 아버지의 힘을 가지고 있어 강대한 짐승을 우상으로 내세워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고, 자신은 그런 짐승의 힘을 이용한다는군요.
이 '우상'이라는 것이 많은 분들이 유추하시는대로 "공공의 적"일지 어떨지는 확신하기 어려우나, 실제로 후루타는 '용으로 각성한 카네키'를 이용하여 모종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고 있으며, 카네키를 이르는 표현 역시 "나의 편", "나의 귀여운 용" 등의, 짐승과 선지자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을 법한 것이었음을 돌이켜보면, 유사한 점은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현재 성경의 구도는 [거짓 선지자(후루타) - 붉은 용(나가라자) - 짐승(카네키)]의 구도로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번화에서의 연출은 카네키가 용의 아이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후루타가 카네키의 힘을 어떻게 이용한다는 것인지는 아직 확답하기는 어렵겠지만, 성경에서 짐승은 '용의 권능'을, 거짓 선지자는 '용처럼 말하는 혀'를 가지고 있어, 둘이 모이면 붉은 용에 필적하는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해요. 후루타의 목적인 초평화가, 과거의 질서를 뒤엎는 것을 전제로 함을 생각해보면, 신에 한없이 가까운 용의 힘을 얻어야만 했던 것은, 다소 필연적이었을 수 있었겠지요.
외에 한가지 특기할 부분은, 붉은 용이 짐승과 선지자 모두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짐승이 가진 그 힘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하지요.
카네키가 가지고 있는 용의 힘이 원래 누구의 것을 뜯어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싶네요.
물론 나가라자가 카네키와 후루타의 친부모일거라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과거 도쿄구울에서 카네키는 카구네를 물려준 리제를 "구울로서의 어머니"로 칭한 바가 있었어요. 만약 후루타와 카네키, 나가라자 사이에 공유되는 모종의 공통분모(Ex.카구네)가 있다면, 나가라자는 굳이 혈연으로서 이어지지 않더라도 카네키와 후루타 모두의 "구울로서의 아버지"가 되는 셈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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