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록 8권 中
그 순간 선두를 걸어가던 마왕이 갑자기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렌, 루루여"
"……빨간 얼룩. 이것도 핏자국인가?"
"앞 쪽의 방으로 전이하기 전에 엘리제님도 이 통로로 다녔다는 말이 되는군요. 렌님, 그 벽면을 보세요"
푸른 머리의 소녀가 가리킨 것은 바닥이 아니라 벽.
피를 닦아낸 흔적.
그런데 루루도 마왕도 그곳으로 더이상 접근할 기색은 없었다. 애처롭게 남은 흔적을 바라보며 통로의 종점까지 말 없이 나아간다.
마지막 문.
그것은 서고의 석판과 같은 돌을 이용한 문이었다. 돌의 표면에는 정령과 비슷한 모습이 새겨진 신전 다운 위엄과 정취를 느끼게 한다.
그것이 파괴되어 있었다.
강력한 힘에 의해서 억지로 왜곡되고, 억지로 열려지게 된 형태이다.
"엘리제?"
『이 문만은 열리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신성도시의 문을 억지로 깨다니 대단한 기술……』
"나는 오히려 안심이야. 이런 부분은 엘리제답고"
찌부러진 돌문 틈을 뚫었다.
눈부신 조명.
무심코 눈을 감을 정도로 강한 빛으로 가득찬 방은 원형의 큰 홀이었다. 벽면은 회색의 배선이 겹겹으로 이리저리 뒤엉킨 기계의 본성. 천장도 기묘한 기계 부품의 집합체로 가득 메우고 있고, 그 기계 부품이 이따금 빛을 발하고 있다.
……샹들리에나 조명이 아니고.
……이 기계부품이 빛나고 있어, 그래서 이렇게 눈부신 건가?
중앙부에는 제단.
계단식으로 3단 구조로 되어 있는 제단에는 안면에 있는 정령의 모양이 찍힌 석상이 모셔지고 있었다.
정령 시에라미리스의 동상.
허공을 올려다보는 모습으로 오른손을 내걸고 그 오른손에 무언가를 움켜쥐고 있다.
——주홍색 열매.
진짜인가, 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아름답게 채색된 과실이었다.
"닮았어……"
『에? 왜 그러신가요 렌님』
"카난에 침묵기관의 공주의 석상이 남아 있는 걸 봤어. 그 석상과 이것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 오른손에 과실 같은 것을 쥐고 있는 것까지 "
에리에스에게 성지를 안내 받았을 때이다.
당시에는 설마 저 석상의 모티브가 되어 있는 소녀가 침묵기관 피오라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참고로 세계록 5권 中
――날개 달린 소녀의 상.
――들어 올린 오른 손에, 어떤 과일처럼 생긴 것을 쥐고 있다.
설마 저게 네크사스(붉은 열매를 맺는 거목)의 과실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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