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칭 + 대명사 (9) 어둠 + 상자
2011년 9월 17일 월요일 + 주택가에 있는 한 원룸
오후 아홉 시 + 달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
연효는 왜 산으로 올라가는 게 좋은 지에 대해 얘기한다. 여기엔 컴퓨터도, 텔레비전도 심지어 라디오도 없으니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다고.
‘이런 일이 이곳에서만 일어나는지, 우리나라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지 아직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연효는 말했다. 맞는 말이다. 어쩌면 전 세계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근데 왜 산으로 가야 하는데?
-일단 며칠간 먹을 건 있는데, 물이 없잖아. 거긴 일단 물이 있고, 높은 곳에서 보면 대충 상황을 볼 수 있으니까. 무기……로 쓸 만한 게 있는 곳도 알고 있어. 뭐 별 건 아니지만. 숨기도 용이하고, 도망가기에도 편해, 산은.
내게는 확실히, 별다른 방법이 없다. 부모님은 한 달 뒤에나 돌아오실 테고 집에 혼자서 있는다고 해도 아니, 집까지 혼자 가는 것도 위험할 지 아닐 지 장담할 수 없다. 뭔가 외부와 연락을 하려면 집에 놔둔 핸드폰이 절실히 필요한데, 그리로 가는 길에는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무엇’들이 가득할 지도 모르니까.
이 녀석과 산에서 있는다……라. 나는 힐끗 연효를 바라본다. 신기하게도 이 녀석은 참 침착하다. 마치 재난 영화에서 나오는 ‘상황에 익숙한 베테랑’ 역을 맡은 것 같달까. 아니면 날 겁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건가.
뭐,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예전에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비실이는 아닌 것 같으니까. 멋대가리 없는 건 여전하지만 말야.
연효는 플래시를(아까의 슈퍼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큼지막한 건전지들도. 대체 어느새?) 챙기고 이리저리 빛을 비추어 본다. 왠지 익숙해 보이는 그런 일련의 동작들을 보고 있자니 아주 눈곱 만큼이긴 하지만 믿음……그래, 의지가 된다. 쳇, 의지가 된다구. 어쩐지 잔뜩 투정을 부리고 싶다. 너는 왜 그렇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음 일을 계획할 수 있냐고.
망원경(원래 가지고 있던 거라고 했다)을 챙겨 넣고, 연효는 대충 짐을 다 쌌다고 했다. 내 몫의 가방을 보니, 에게, 내가 들고 다니는 백도 이것보다는 무겁겠다 싶다. 이 자식, 아무리 여자이기로서니 날 무슨 성냥개비로 안담?
“야, 그냥 반반으로 나눠.”
“무거울 텐데?”
“아, 조용히 하고 그냥 달라구. 그런 배려는 필요 없네요.”
녀석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더니 자기 배낭에서 물건들을 빼네 내 쪽으로 담기 시작한다. 먹을 것, 옷가지들, 세면 용품, 여자 속옷……잠깐, 뭐?
“야, 이건 뭐……?” “며칠 걸릴지 모른다고 했잖아. 옷은 뭐 네가 불편한 대로 내 걸 입는다 쳐도 이건…….”
“뭐? 이거 어디서 났는데?”
아까 슈퍼에서. 당연하단 듯이 나를 쳐다본다. 아, 이놈, 대체 그 짧은 시간에 뭘 그리 많이 생각하고 집어넣은 거람. 아니 그보다…….
나는 슬쩍 속옷의 사이즈를 확인해 본다. 75……B. 이 자식. 어떻게 알았……. 고개를 홱 쳐드니 놈은 고개를 돌리고 괜히 더 들고 갈 게 없는지 살피는 기색을 낸다. 망할…….
“준비됐지?”
여하튼, 결국 밖을 나서기로 한다. 연효는 한 손에 나무로 된 야구방망이를 들고 나에겐 플래시를 맡긴다. 불을 끄고, 커튼을 닫는다. 순식간에 방은 캄캄해진다. 슬며시 손을 뻗어 녀석의 배낭을 잡는다.
“그런데, 있잖아. 저거……. 시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저건 어쩔 건데?”
“어쩌겠어, 놔둬야지. 지금 저걸 처리하는 것보다…….”
샤르륵. 연효가 말하는 도중 갑자기 모래를 뿌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뭐지? 뒤를 돌아본 우리는, 죽어있던 ‘그것’의 몸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나를 닮은 ‘그것’의 팔이, 다리가, 온 몸이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희미해지더니 마침내 한 줌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까만 가루가 바닥에 내려앉는다. 꼭 푸석한 빵 덩이가 망치에 맞아 바스러지는 것 같이.
“무슨…….”
그리고 우리는 눈앞의 ‘그것’이 사라지는 것보다 더 이상한 사실을 깨닫는다. 모든 불을 끄고 커튼도 닫은 방. 어둠에 아직 눈이 익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눈앞의 ‘그것’은 아주 선명히 보이는 채로 사라졌다. 눈앞에 있는 까만 가루도 마찬가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방 안에서 ‘까만’ 가루는 아주 또렷하게 보인다. 지금. 연효와 나는 그 이상한 광경을 빨려 들어가듯 보고 있다. 온통 까만 이 방 안에서, 그 어둠에 파묻혀야 할 까만 가루는 스스로 빛을 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칠흑 같다’는 표현을 떠올린다. 방 안의 어둠에 더 어두운 옷칠을 한 것처럼, 까만 가루는 온통 까만 속에서 까만 색의 광택을 낸다.
뜬금없지만 나는 초등학교 과학 시간 때 만들었던 ‘어둠상자’를 떠올린다. ‘오늘은 우리가 어떤 과정을 통해 물체를 볼 수 있는지 알아보겠어요.’ 아이들에게 안대를 주며 눈을 가리게 하던 선생님의 목소리도.
“……자.”
“가…….”
그 때 내 어깨를 치는 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연효는 내 어깨를 돌리더니, 작게 말한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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