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기(出生記) - 유치환
검정 포대기 같은 까마귀 울음소리 고을에 떠나지 않고
밤이면 부엉이 괴괴히 울어
남쪽 먼 포구의 백성의 순탄한 마음에도
상서롭지 못한 세대의 어둔 바람이 불어오던
융희(隆熙) 2년!
그래도 계절만은 천년을 다채(多彩)하여
지붕에 박넌출 남풍에 자라고
푸른 하늘엔 석류꽃 피 뱉은 듯 피어
나를 잉태(孕胎)한 어머니는
짐즛 어진 생각만을 다듬어 지니셨고
젊은 의원인 아버지는
밤마다 사랑에서 저릉저릉 글 읽으셨다
왕고못댁 제삿날밤 열 나흘 새벽 달빛을 밟고
유월이가 이고 온 제삿밥을 먹고 나서
희미한 등잔불 장지 안에
번문욕례(繁文縟禮) 사대주의의 욕된 후예로 세상에 떨어졌나니
신월(新月)같이 슬픈 제 족속의 태반(胎盤)을 보고
내 스스로 고고(呱呱)의 곡성(哭聲)을 지른 것이 아니련만
명이나 길라 하여 할머니는 돌메라 이름 지었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