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루토 망한 이유 생각해봄. 나루토는 페인전부터 회생불가능한 쓰레기가 됐다
나루토 초반부는 정말 소년만화를 떠나서, 아니 만화를 떠나서 설정이나 연출 면에서 매우 훌륭했다고 보는데
그건 인간성이 도구적으로 소모되는 닌자라는 정체성과 그 정체성을 형성하는 세계관의 그로테스크함, 잔혹함이
표현상의 기법면에서, 또 인물 묘사면에서 서사적으로 매우 훌륭한 조화를 이뤘기 때문임
거기에다 자부자편, 사소리편, 대 카쿠즈-하딘편 등등 적절한 파워 밸런스로 닌자만의 한끝승부를 지켜보는 맛이 컸음
아무리 강해 보여도 아무리 애송이 같아 보여도 상황과 형편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액션의 참맛이 있었다는 거임
그리고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던 게 바로 악역들의 오리지널리티임
생각해 보셈. 사소리, 자부자, 하쿠, 오로치마루, 데이다라 등등 그들은 인과응보를 받지만(아, 오로치마루는 아닌가... 에휴)
과거를 술회할 때면 후반부에 비해 비교적 객관적인(관찰자적인) 묘사
혹은 독백이나 회고로 담담한 자기고백적인 묘사를 통해 감정이 절제된 아련함을 자아냈음.
이런 식으로 쓸쓸하게 과거를 조명하면서도 그들은 후회하는 법이 잘 없었다는 게 좋았지
전기의 악역들에게는 과거에 대한 체념은 있어도 반성이나 개과천선 같은 그런 모습은 잘 없었다는 거임
근데, 그런 식으로 전반부의 악역들은 자기의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하고(마치 서정주의 자화상에서처럼)
이렇듯 악역들의 다양하고 비정상적인 정서나 사상 그 자체가 나루토 전반부의 분위기를 일구는 데에 상당한 일조를 했다고 봄
물론 나루토의 스토리텔링이란 기본적으로 악역들의 언행과 나루토의 언행을 대비시키는 거였음
다만 전반부와 후반부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전반부는 여러 악역들이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면서
나루토의 질서에 통합되기를 거부 혹은 지연했다는 거임
내 식대로 살겠다거나 반성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은 살아온대로 살아갔겠다는 식이었지
아니면 체념하면서 처연하게 죽거나.
헌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자기정당화 또는 반성부재를 묘사하다보니 그들에 대한 처분도 훨씬 깔끔해지더라는 거야
이건 나루토의 전반부가 나루토와 악역들의 대치 구도 속에서 악역들이 차례차례 등장했다가 차례차례 죽어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전반부의 악역들이 대부분 얼마나 깔끔하게 쳐뒤졌는지를 떠올려봐. 그리고 후반부의 악역들이 대부분 얼마나 구질구질하고 지저분하게 다뤄졌는지도 생각해보셈(오로치마루나 가부토도 걍 일찍 뒤졌어야 했는데..)
좀 오버해서 나루토의 전반부는 마치 스베틀라나 알렉세이비치의 다성 소설(다중 목소리 소설)을 읽는 것 같았다
물론 나루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전기에도 후기에도 나루토의 목소리였다는 건 부정하지 않음
다만 전기에는 나루토의 목소리 만큼이나 악역들의 목소리도 중요했다는 거임
뭔 소리냐? 후기에도 구차하게 애들 사연 다 소개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하실 분들이 있을까봐 노파심에 미리 말하는데
곰곰히 생각해보셈. 아닌 경우도 많았지만, 후기의 악역들 중 다수는 나루토에게 감화되어서 심리학적으로 표현하면 거세당하는 경우가 많았음
가령 페인이 그랬고, 오비토가 그랬고, 가부토가 그랬고, 사스케가 그랬음.
이는 이타치의 경우도 살짝 유사한데
(물론 이타치는 나루토에게 감화돼서 변한 게 아니라 하나의 반전으로서, 원래 그랬는데 독자에게 주어진 정보의 부족으로 오해가 있었던 캐릭터지만)
전기 이타치는 매우 이례적인 캐릭터였음. 매우 불온하고 반인륜적인 새키지만
바로 그런 불온함과 반인륜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새키 사상을 잘 들여다보면 니체적이고 초인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었음(한 마디로 오로치마루와 동류)
뭐 후기 이타치가 그렇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오리지널리티가 많이 훼손된 느낌이 들었음, 개인적으로. 마치 나루토 쪽으로 편입되는 느낌.
이렇듯 나루토에게 직접 감화되지 않더라도 나루토적인 가치로 전향하는 인물들이 많았다는 거임
나쁜놈은 나쁜놈일 때만 재밌는 거다
왕좌의 게임에서 리틀핑거가 개과천선한다고 생각해봐라. 피의 결혼식을 벌여놓고 프레이가 스타크 앞에서 잘못을 참회하는 꼴을 생각해봐라.
각종 사이코짓을 일삼았던 램지 볼튼이 갑자기 자기의 행동들을 진심으로 후회한다고 생각해봐라
나쁜놈은 나쁜놈일 때만 재밌는 거고 사이코는 사이코일 때만 재밌는 거다
추격자에서 하정우가 갑자기 반성을 한다던가 살인의 추억에서 범인이 눈물을 흘리며 자수를 한다고 생각해봐라
베테랑에서 유아인이 죄송함다! 하면서 유가족들에게 최대한의 보상을 해준다고 생각해봐라. 그게 재밌겠냐?
캐릭터의 입체성이란 상반되는 영역을 오가는 이원론적 전환을 통해서는 결코 달성될 수 없는 것이다
근데 나루토의 후바부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나루토 쪽으로 악한들이 편입되어가는 과정, 그게 바로 나루토 후반부의 핵심이자 스토리 폭망의 원인이다
보통 전반부를 보면 대개 이런 식의 감화 혹은 유대라는 건 같은 편끼리만 일어나서 자연스럽기도 자연스럽고 나쁜놈들도 사이코도 선역들도 느낌 잘 살았는데
무리해서 악역들을 감화시키려고 하니 전반부의 그 독특함이 사라진 거지. 휴머니즘을 하고 싶어서 성범죄자들의 성기를 자르는 꼴이다
물론 결국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건 후반부였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과의 화해, 용서할 수 없는 것들과의 용서.
그런 식으로 유대를 넓혀나가는 세계.
그러나 이건 겉만 번지르르한 오리엔탈리즘이나 다름 없다. 옳고 그름으로 구조화해 놓고 "유대"라는 허상 좋은 억지로 그른 것들을 옳은 것으로 변화시켜 모든 것을 봉합하려는 계몽주의적 시도인 것이다.
허나 이러한 시도를 통해서 얻는 효과란 캐릭터들의 소품화, 수단화밖에는 없다.
캐릭터가 당연히 작가의 주제의식을 전하는 도구이고 수단이지 뭔 헛소리래? 할 사람들 없지 않을 거다.
물론 도구이고 수단이지만 작가의 주제의식이 너무할 만큼 커지면 캐릭터들의 본래 생명력을 잃게 되고, 그렇게 인물들은 인형이 되어간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문학사에서는 이러한 작가적 태도를 근대서사적 특징이라 하고, 우리나라로 치면 개화기시대의 서사적 특징이다
다시 말해 자의식과잉으로 인한 리얼리티 상실.
돌이켜 보면 나루토라는 작품 그 자체가 마사시의 무한 츠쿠요미 세계였다.
즉 억지라는 소리다.
억지도 억지거니와
닌자 시스템 아래 나루토의 세계에서 일생을 보내며 살아왔던 사람들은 착한 녀석들만 있는 게 아니고,
그런 모순적인 군국주의 시스템 아래서 불가항력적인 삶을 지내다 보면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정신적으로 기형아들이 태어나기 마련이다.
나루토가 진정으로 매력적이었던 건 이런 기형아들 제각기의 목소리와 그 목소리들이 빚어내는 세계의 울림이었지
기형아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억지 감동이 아니었다
휴머니즘이 억지가 되면 그거야말로 최악의 통속적 신파극이 된다는 걸 명심하자
해서, 나는 페인전이 나루토 폭망의 시작이었다고 본다.
페인전을 기점으로 악한들의 목소리 상실 및 인형화가 대거 발생하고 이를 통해 작가의 자의식과잉이 강하게 드러나면서도
파워 인플레가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초기 나루토의 페이스로 봤을 때, 이건 소년만화의 장르적 한계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는 걸작이 났다고 생각했다.
계속 소년만화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을 감지하면서도 그래, 본디 소년만화인데 소년만화의 왕도를 걸으면서도 성숙한 서사적 퀄리티를 보여준다니 그거야말로 더 놀라운 일이지 싶었다. 소년만화적 열정과 탈소년만화적 냉정을 오가며 천부적인 줄다리기를 보여주던 나루토였으니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지(특히 하쿠편이야말로 그 줄다리기의 절정이라고 본다) 허나 페인전 이후부터는 소년만화로서도 실망스러웠다. 기본조차 안 되는, 초반 설정과 초반 전개의 추억으로 팔아먹는 만화가 되어갈 뿐이었다. 실망스러웠다. 문득 읽다가 그런 감정이 북받쳐올 때면 예전에 읽었던 한장한장의 기억들을 찢어버리고 싶어졌다. 그러면 기대한 만큼 실망할 일도 없을 텐데... 그러다 오비토가 다 뒤져갈 쯤에는 마침내 읽기를 포기했다.
나루토를 포기하고 한참 후에야 나루토가 끝났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전해듣게 됐는데
뭔가 좀 씁쓸하고 아쉬워지더라. 중고등학교를 나루토 읽으면서 보냈는데 그게 끝나다니... 참, 좋은 시절 다 가버렸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재밌었는데.. 참 재밌었는데.. 하여튼 그 재밌던 시절도 가버리고 나루토도 훅 가버렸는데 왜 훅 갔는지 곰곰히 생각해보니까 이런 결론이 나더라는 얘기다.
오히려 너무 원론적인 이야기를 댓글로 달으셔서 저도 원론적인 얘기만 할 수밖에 없는데..
작품의 본질 자체가 부인당하는 시대고 모든 텍스트 읽기를 오독이라고 하는 이 시대에 해체될 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새삼스럽게
각자의 가치관에 입각환 주관적인 의견의 하나라고 하면
왜이렇게 당연한 이야기를 하시나 또 한 번 새삼스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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