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에 자신 있던 전략가 vs 전략에 자신 있던 전술가
업 공략전은 전술에 자신 있던 전략가 왕전과, 전략에 자신 있던 전술가 이목이 맞붙어서 각자가 자신 있어 하던 분야에 패배한 전쟁이라고 봅니다.
스포가 맞던 틀리던, 왕전이 큰 그림을 그리는 능력은 이목의 그것보다 우월해 보입니다. 함양에서 출진하기 전부터 창평군에게 보급이 끊길 경우를 대비하여 최후의 대비책을 부탁했고, 업을 정찰하며 식량 공세라는 기책을 떠올린 후에는 열미로 귀환하는 이틀 동안 기책을 가다듬어 업을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으니까요. 군사 뿐만 아니라 조나라(와 스포가 맞다면 제나라)의 정세까지 계산에 넣은, 왕전의 섬세한 전략이 이목의 전략을 정면으로 격파했습니다. 훗날 왕전이 이목을 반간계로 치우고 조나라를 멸망시키듯이, 왕전은 여러 가지 요소를 계산에 넣는 대국적인 시각을 지녔습니다.
왕전의 전략을 보면
1. 전군이 열미에서 출진하여 아홉 성의 난민과 첩자들을 업으로 몰아 넣는다.
2. 왕도군은 도양왕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움직이지 않는다.
3. 진군은 첩자들이 식량을 불태우고 업이 함락될 때까지 분할하여 업을 포위한다.
3.1. 요양군은 위치를 보면 견융이 참전할 가능성이 높으니, 견융과 상성이 가장 좋을 듯한 양단화군을 요양군과 붙이고, (실력은 있지만 이목을 상대로 데려가기에는 애매한) 벽을 양단화에게 지원군으로 보낸다. 양단화군과 지원군은 어떻게든 업이 함락될 때까지 요양군을 막는다.
3.2. 왕전군은 어떻게든 업이 함락될 때까지 알여군을 막는다.
3.3. 환기군은 어떻게든 나머지 군을 막아 업의 포위를 유지하고 업을 말려 죽인다.
4. 업이 함락되면 환기군과 왕전군은 업으로 입성하여 농성한다.
5. 창평군에게 일러둔 최후의 비책 덕에 진군은 보급을 얻는다. (양단화군의 보급은 어떻게 하려고 했을지는 모르지만, 아마 견융의 성을 점령하는 것까지 예측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벽이 병량을 불태워 먹지 않는다는 것을 상정했던지...)
6. 이겼다! 업 공방전 끝!
훌륭한 큰 그림입니다. 3.1-3.3의 '어떻게든' 이라는 부분이 걸리지만, 환기와 양단화와 왕전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실력자들입니다. 어떻게든 되겠죠.
어쨌든 세 장군 중 가장 지력이 높은 왕전이 이목을 상대하려고 주해 평원으로 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여기서 왕전과 이목은 군을 셋으로 분할하여, 상대에게 승리한 좌군 혹은 우군과 중앙군이 출격하여 상대의 중앙군을 협격한다는 전략을 세웁니다.
결국 왕전의 전략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약 100화 만에 성공합니다. 좌익에 몽념과 마광을, 우익에 왕분과 이신과 아광을 배정한 것이 적중한 것이죠.
이는 만년 천인장 아화금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다만 왕전의 전체적인 전략과 주해 평원에서의 전략과는 별개로, 세부 사항은 이목의 전술 때문에 많이 어긋났습니다.
1. 개전의 날에는 마광의 파상 공격이 이목의 스텔스 공격 때문에 막히고, 마광까지 전사했습니다. 이 때부터 왕전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끼고 배급을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2. 사흘째 날에는 이목이 본능형 요운을 우익에 투입했습니다. 때문에 예비 전력으로 아껴두던 본능형 비신대를 우익에 몰빵했고, 뒤가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3. 아흐레째 날에는 이목이 자신의 전술을 격파하는 바람에 아광이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 때는 왕전도 도박을 하지 않는다는 평소의 방침을 깨고, 이신과 왕분이 각성한다는 시나리오에 올인했습니다. 그나마도 왕분은 각성할지 불투명했던 상황...
4. 열사흘째 날에는 이목(과 조아룡)의 책략 때문에 왕분이 전투 불능 상태가 됐습니다. 이후 비신대가 우익의 지휘권을 잡았다는 말을 듣자 작중 최초로 움찔하며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죠. 저번에도 언급했지만, 왕전의 반응을 보면 비신대가 우익의 지휘권을 잡는다는 상황을 상정하지 않았거나 기대를 안 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비신대의 소식을 듣기 전에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왕분마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으니,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을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5. 열닷새째 날에는 드디어 이목과 정면으로 싸웠습니다. 초반에는 이목에게 조금 휘둘렸지만 이내 이목의 전술을 간파했습니다. 하지만 진영을 재정비하여 우위를 점했다는 듯한 전리미의 독백에도 불구하고 이목과 호각으로 싸우는 데 그쳤습니다. 이후 마남자가 스텔스 협격을 걸었을 때는 이목보다 빨리 본진을 버렸습니다. 몽념과 왕분 덕에 탈출하기 전에는 왕전 본인이 말했다시피 사지에 있었죠.
이를 보면 신분념 트리오가 각성한 덕에 알여군을 막았고 업을 점령했다는 말은 겸손한 게 아니라 팩트입니다. 저 셋이 이목의 전술에 휘말려 왕전의 전략이 틀어지는 상황을 가까스로 막았으니까요. 왕전이 언제나 유능한 부하를 등용하려고 혈안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의 큰 그림을 성사시켜 줄 유능한 부하가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래서 저는 업 함락전이 전술에 자신이 있던 전략가 왕전과, 전략에 자신이 있던 전술가 이목이 만나서 각자가 자신 있어 하던 분야에 패배한 전쟁이라고 보는 겁니다. 왕전은 전략으로는 이겼지만 전술로는 이목에게 자주 밀렸습니다. 반대로 이목은 날카로운 전술로 왕전을 여러 번 몰아 붙였지만 결국에는 왕전의 전략을 못 막았고, 심시티 방어 전략마저 심각한 삽질로 귀결될 듯합니다.
각자가 자신 있던 분야에 밀렸으니, 왕전과 이목은 서로 "아니 이 새끼가?!" 하는 심정일 것 같습니다. 전공 분야에서는 밀리지 않았지만요. 다음에 왕전과 이목이 정면으로 붙을 상황이 기대됩니다만, 그 때 이목은 치사하게 사마상을 대동하여 둘만의 정면 승부는 못 보지 않을까 싶네요...
덤:
오천인장이 '장수'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면 이목의 이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장수에게는 밀리지 않지만 오천인장에게는 밀린다는 괴상한 결과가 나와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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