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키와 에토의 심리 추측, 도쿄구울은 비극이 아니다. #1
이 글을 읽기전에 먼저 읽어두시면 이해하기에 소소하게나마 도움이 될 제 이전글입니다 : http://m.chuing.net/zboard/zboard.php?id=mtokyo&no=30258 (노로와 점장의 이해관계)
●글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씁니다. 분할은 제목 뒤에 #숫자 붙이는걸로 표기했어요. 솔직히 에토보다는 카네키에게 맞출듯해요.
1.카네키 켄
그는 비참합니다. 과거는 혐오와 분노로 얼룩지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기위해 자기합리화를 함으로서 스스로를 속이고, 결국 그의 삶은 거짓으로까지 덧칠되어있지요. 심연은 깊고, 그렇기에 카네키 켄에게 있어서 삶은 역경과 놓을 수 없는 고난의 다른 이름일 뿐일겁니다. 왜 내가 고통받아야 하지? 나에게 잘못이 있는걸까? 이런 자문조차도 이제 그는 더이상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고통은 부조리함이 아니라 단순한 일상이자, 그의 삶을 한 단어로 요약한것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는 망가졌고, 그렇기에 무뎌졌습니다.
그는 수많은 각성을 거칩니다. 구울이 아닌 인간일 무렵에조차도 말입니다. 마음을 닫은 책찌질이에서, 히데의 구원으로 점차 인간카네키라는 정체성을 갖습니다. 이또한 각성이며, 이 상태는 꽤 오랜 시간동안 유지됩니다. 그리고 그가 이것을 이끌어준 히데에게 갖는 감정은 친구사이의 우정을 넘어선, 가족에게나 느낄법한 친애에 가까웠지요.
하지만 점차 카네키는 히데를 떠나보냅니다. 바로 그건 군집속에 섞여살며 인육을 탐하는 괴물, 구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작품에서는 그냥 구울일 뿐이지만, 전 이것이 갖는 의미는 그 이상이라고 봅니다. 구울은 먹이사슬에서 정점에 위치한 인간을 넘는 자연이 낳은 최고의 걸작입니다. 그렇기에 구울의 존재는 무척이나 자연의 본질적인 부분을 닮았습니다. 바로 포식과 피식의 관계, 먹이사슬의 서열관계. 요컨대 살아가기 위해서는 결국 누군가를 배제해야 한다는 이치를 극단적으로 강조한 상징성을, 바로 구울은 갖고있지요.
연약한 카네키, 한심하고 우유부단한 애송이. 하지만 그건 어린 아이의 순진함이기도 합니다. 책을 사랑하고, 그가 눈을 감으면 아직도 아름다운 용이 그를 향해 미소짓지요. 그런 그가, 현실의 비참함과 자연의 이성적인 차가움을 극도로 강조한 존재가 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아직 어린 소년이 동화와 꿈에서 벗어나 현실의 암담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되지요. 그리고 이건 곧 아이가 어른이 되감을 암시합니다. 다시말해, 구울은 현실의 차가움과 매정함을 상징하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서 그는 극도의 성장통을 겪습니다. 현실은 동화와는 너무나 다르고, 미숙한 소년이 닿기에는 아직 너무나 지고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누가 나눠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카네키의 빛도 그를 끌어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늘 그래왔기에, 고통을 극복하려들지 않고 무시하려듭니다. 그러면 적어도 수 초의 찰나만큼은, 고통이 느껴지지 않을테니까요. 그리고 고통에 무뎌지기위해 심리적 방어기제를 드러냅니다. "나는 아프지 않아, 봐, 괜찬잖아" "이제 어른(구울)이 됐어"그리고, "나는 어른(구울)이다.". 바로 백카네키가 된 순간입니다.그렇습니다. 카네키가 백카가 된 그 순간에조차도, 카네키는 진정한 구울이, 진정한 어른이 아니었습니다.
이후로도 늘 그는 괴로워요. 성장통은 무뎌졌지요. 스스로에게 거짓을 말하며 괴로움을 없앴으니까요. 그게 살아간 삶의 방식이었고, 그는 더이상 히데에게 다가가지 못합니다. 히데는 여름날의 즐거운 추억, 동심, 카네키가 어린 아이로서 있을 수 있게해준 순수함을 대변하니까요. 그런 히데에게, 타락하고 더럽혀진 자신이 다가선다는 것은, 곧 자신의 낙원을 자신의 역한 두 손으로 더럽히고 범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때까지도 그에게 히데는 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카네키는 어른이 되어갑니다.
범고래전에서, 그는 비로소 어른이 되가는 길의 중간즈음에 다다릅니다. 하지만 현실을 딱 반만 받아들인 그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한 괴로움을 느끼죠. 어중간하니까요. 이제 나는 어른이라며 거짓을 말하기에는 너무 많이 알았지만, 동시에 어른이 아니기에, 성장통을 무마할 수 없어졌고, 결국 생으로 고통을 전부 느낍니다. 히나미도, 반죠도, 츠키야마도, 토우카도, 니시오도, 아무도 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고통을 바라볼 수 밖에. 이 짐은 누가 대신 들어주는 짐이 아니었으니요. 이 괴로움이 아마 반카쿠쟈의 광기가 상징하는 바라고 추측해봅니다.
그에게 있어서 점장은 무엇이었을까요. 부모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안테이크는 집이자, 어린아이가 살아가는 안식과 구원의 공간, 낙원입니다.
그리고 안테이크전에서 그 집은 무너지죠. 부모는 손쓸 수 없이 점차 침몰하고 있네요. 어린 카네키는 되도않는 자신의 힘을 믿고 가련하게도 아직 넘을 수 없는 현실에 도전하는걸까요.
반쪽짜리 어른, 사춘기의 소년. 반항기의 탕아.
그에게 집이 무너진다는건, 행복이 무너진다는 것은, 소년이 쉴 곳이 사라진다는, 순수한 소년으로서의 마지막 보루가 끝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나 필사적이라니, 그는 모든걸 잃을각오로 무너져가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위해 높은 현실의 벽에 덤빕니다. 두고온 것들은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고 스스로를 현혹한 채, 자만심많은 사춘기 아이는 무작정 덤비지요. 그리고 그 현실은 아리마 키쇼, 괴물입니다.
눈내리는 그날 밤, 카네키는 어떻게보면 마침내 진정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현실을 넘지 못했지만, 결국 그는 순응하는 법을 배우지요. 그리고 갈등하던 정체성을 해결하고 조금 쉬기로 합니다. 백카와 흑카가 합쳐짐은, 사춘기 아이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이 끝을 맺고 이제 그가 완전한 어른이 됨을 상징한다고 봅니다.
2.사사키 하이세
그는 행복합니다. 지난 여름의 볕은 그를 축복하고, 모두가 자신을 떠안아 줍니다. 그 삶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영원하진 않으리란걸 예감하지요. 하지만 아직도 고개를 돌리면 미소짓는 용과 노루들. 그것이 현실이라 속이며 그곳에 안주하고 눌러붙습니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측은한, 아이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한 켠에서 들려온 진실의 목소리가, 그에게는 마냥 두렵습니다. 조금만 눈을 돌리면 낙원이 있는데, 왜 귀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추함만을 드러낼까요. 그것이 악이라 믿고 그걸 기피합니다.
옥션전에서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존재와 마음속 더러운 진실을 조금이나마 눈치챕니다. 그건 현실이 그를 기다리지않고 다가왔기 때문인데요. 여기서의 현실은 곧 타키자와입니다. 그는 그토록 자신이 피하던 그것의 힘을 빌리고 빌리지 않았다고 부모에게 거짓을 고합니다. 여기서 부모는, 아리마 키쇼이지요.
죄책감이란 참 무섭지요. 그는 살아남기위해 자기가 두렵고 혐오하던 또다른 세계를 이용한 스스로의 영악함에 죄책감을 갖고, 이것은 호기심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마음속에서 자고있던 현실과 삶의 진실이 깨어날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츠키야마 섬멸전에서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밀려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진실을 이해하기로 결정합니다.그리고 스스로가 어른이 된 진짜 자신이 어리고 행복한 지난 날들을 추억하며 만든 가짜, 연극놀이, 단순한 꿈임을 이해하고 깨어납니다. 그리고 꿈인 자신은 사라집니다.
3.히데 - 도쿄구울 전반
히데는 이미 사망했다고 생각하긴 합니다만, 또 모르긴하죠. 하지만 이 친구의 생사여부와는 무관하게 그는 데미안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카네키는 에밀 싱클레어구요. 특히 단적으로 상단에 이미지가 추가되어있는 옥션전 각성씬에서 히데와 닮은 카네키를 볼 수 있었네요. 마치 데미안의 마지막 구절, "...나는 내 영원한 친구, 데미안과 똑 닮은 스스로를 발견했다."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데미안은 원작에서도 에밀 싱클레어가 어른이 되는 그 순간과 함께 사망합니다. 그를 떠나가게돼요. 요컨대 데미안은 에밀이 어른이 되기위한 마지막 각성을 위한 존재였고 히데도 이와 동일하다 봅니다.
그리고 설사 히데가 살아있다고해도 이전과는 다른 상징성을 갖는, 다시말해 이전의 히데가 아닌 존재, 더이상 카네키의 데미안이나 구원이 아닌 존재가 될거라고 생각합니다.
#2에서 이어써요 ㅋㅋ. 컴퓨터가 터져서 계속 모바일인게 천추의 한.. +겨우 컴퓨터로 와서 가독성 좀 낫게 수정했습ㄴ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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