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게문학/약스압]사슴4
영화관을 나왔을 땐 해가 지고 있었다. 내 머리 위는 아직 파란색이었지만, 노을빛 때문에 건물 창문은 노란색이었다.
우리는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비올레를 잡는데 필요한 재료들을 구입했다.
밧줄, 기름, 호스, 망치, 못, 향수..... 그리고 밤에 먹을 간식과 물도 샀다.
우리는 준비물을 다 사서 사람이 없는 재건축 지대로 향했다. 아침에 옥상에서 밖을 관찰하면서 눈여겨본 건물이 있었다. 낮에는 한창 철거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밤에 가 보니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의 바다에 아직 철거되지 않은 건물 몇 채만 섬처럼 서있었다. 무서웠다. 이유는 없지만 원래 밤에 이런 곳에 있으면 많이 무서웠다.
어쨌든 나는 라헬과 함께 계속 걸어서 폐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외벽에 빨간 페인트로 크게 X자가 그려져 있어서 좀 찜찜했지만, 안은 나름 깨끗하고 괜찮았다. 5층, 아니면 6층 건물인 것 같았다. 우리는 5층으로 올라가서 무대를 세팅했다.천장을 살짝 뜯어서 개조했는데, 먼지가 많았다.
우리는 공사를 끝내고 4층으로 내려왔다. 전기는 끊겨 있었지만 내가 어떻게 만지니까 형광등이 켜졌다.
아무 방이나 들어가서 주저앉아서 쉬었다. 앉아서 물을 마시니 문득 아침에 하던 대화가 생각났다. 나는 가고싶은 곳이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다시 물어봤다. 라헬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그 후에도 라헬은 무언가를 생각할 때면 항상 먼 곳이나 위쪽을 바라봤다.
"모르겠어요. 갈 곳이 없어요..."
라헬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듣는 사람까지 우울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그럼 이..."
내 포켓이 울렸다. 상부의 메시지였다.
"잠시만."
나는 말을 멈추고 메시지를 열었다. 라헬이 고개를 내려 내 포켓을 쳐다봤다.
[지원 부대를 보냈으니 당장 라헬을 데리고 근처의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가서 12시간 동안 숨어있길 바람.]
원래 퍼그가 쓰레기 집단인 건 알았지만 이 정도로 무능하고 멍청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근처의 가장 안전한 곳으로 가라는데?"
나는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게 어딘데요?"
"몰라." 나는 시각을 확인했다. 8시 20분경이었다.
"...시간 됐다. 비올레 잡으러 갔다 올게."
"이길 수 있어요?"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대답해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냥 밖으로 나와 거리를 걸었다. 아직도 하늘을 떠도는 쿤의 등대가 보였다. 등대는 거의 즉시 나를 포착했고, 2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비올레와 부하 두명이 나타났다.
세 명은 이유도 없이 나를 쫓아왔다. 그래서 나도 이유 없이 바로 폐건물을 향해 도망쳤다. 나는 잡히지 않으면서도 셋의 시야에서 벗어나지는 않을 정도로 거리를 조절해서 뛰었다. 어느새 우리는 5층에 도착했다. 나는 무대장치가 세팅된 방에 들어가 잠시 숨을 골랐다. 비올레와 부하들이 바로 쫓아왔다. 가장 느린 악어가 마지막으로 문턱을 넘는 순간, 압축이 풀린 내 등대가 떨어지며 방 문을 틀어막았다.
나는 바로 전창을 쿤의 작은 압축 등대에 쏴서 등대를 박살냈고, 그와 거의 동시에 준비한 향수병을 집어서 악어의 얼굴에 빠르게 던졌다. 작은 악어는 시끄럽게 포효하면서 비틀거렸다. 나는 소매에 숨겨둔 망치를 꺼내며 투명한 신수 베일 속에 숨었다. 등대는 더 이상 없었고, 코가 좋은 악어는 싸구려 향수 냄새에 취해있었다. 나를 탐지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나는 바로 달려가 몸부림치는 라크 레크레이셔의 미간을 내리찍어 기절시켰다. 그리고 옆에 있던 아게로의 머리도 망치로 세 번 후려쳐서 쓰러뜨렸다.
망치로 때리지 않고 전창술을 응용해서 제압할 수도 있었지만, 악어 같은 짐승이나 쿤 가문 놈들은 원래 전기가 잘 통하지 않는 부류라서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바로 망치를 비올레에게도 휘둘렀다. 하지만 역시 슬레이어라 그런지, 비올레는 부하들과 달랐다. 푸르스름하고 투명한 반구형 신수 배리어에 부딪친 망치는 그대로 부서져버렸다. 정확하진 않지만 방에 들어오고부터 여기까지 대략 7초정도 걸린 것 같다.
비올레는 배리어로 자신을 지키면서 가시로 붉은 신수를 퍼뜨렸다.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도 물건을 더듬어서 느낄 수 있듯이, 붉은 신수에 닿으면 직접 보이지 않아도 감지될 수 있었다. 멍청한 하진성의 제자답게 벽을 부수고 밖의 등대를 가져온다는 선택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내는건 시간문제였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말아야했다.
나는 붉은 신수의 영역 밖으로 빠져나와 천장에 늘어진 호스들을 끊었다. 끊어진 호스에서 휘발유가 철철 쏟아졌다. 휘발유가 아게로와 악어를 적셨고, 비올레의 배리어도 휘발유 범벅이 되었다. 스파크를 살짝 가해주니 뿌려진 휘발유가 폭발했다. 화염이 비올레와 부하들을 집어삼켰다. 비올레는 동료들을 신수로 감싸 배리어 안으로 들인 뒤, 불길을 걷어내려고 애썼다. 그덕에 악어와 아게로의 몸은 끔찍한 불구덩이 속에서도 거의 온전했다. 비올레가 얼굴을 찌푸리며 괴로워했다. 신수 제어 역량에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화염이 배리어를 갉아먹었다. 여전히 견고하고 두터웠지만 아까보단 확실히 약해져 있었다. 내가 천장을 살짝 부수자 천장은 제일 중요한 블록이 빠진 젠가 처럼 내려앉았다. 콘크리트와 시멘트 덩어리가 비올레를 덮쳤다. 큼직한 파편들이 배리어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아까 문을 틀어막는 데 썼던 등대도 압축시켜 전속력으로 비올레에게 쳐박았다. 금이 간 배리어가 얼음이 녹듯이 점점 얇아지다 없어졌다.
나는 신수 베일을 벗고, 젓가락 크기의 전창을 비올레의 가슴팍에 던졌다. 비올레의 몸이 밀가루 포대처럼 쓰러졌다. 나는 소화기로 불을 끄고 기절한 놈들의 몸에 확실한 제압을 위해 작은 마비용 전창 여러개를 꽂았다. 셋 다 고슴도치같은 모습이 됐다. 그리고 비올레와 아게로와 악어의 몸을 밧줄로 굴비처럼 엮은 뒤 계단을 내려왔다.
4층으로 내려와서 우리가 있던 방의 문을 열었다. 8시 4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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