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북한은 왜 3일간 서울에 머물렀는가?
6월25일 전쟁 초기는 정말 암울했음
개전 하루만에 개성,동두천,포천이 점령당하고
북괴는 철저하게 세워진 계획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격해 서울 방어의 핵심지였던 의정부를 돌파함
개전 3일만인 6월 28일 서울에 입성함
당시 서울에 입성한 북괴의 규모는
5개 보병사단과 350대의 탱크로
실로 엄청난 규모의 군대였음
북괴가 서울을 장악한뒤 곧바로 한강을 건너 남하를 시작하고
이미 수도 방어에서 국군이 거의 전투력을 상실했다고 봤을때
북괴는 보병사단이 일일 진격할수 있는 최고 속도로 일일 25키로 매일 진격해서
3일만에 조치원
6일만에 대전까지 함락될 위기였음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북한군은 3일간 서울에 머물며 진격하지 않았음
전쟁 초기에 진격을 멈춘다는 것은 전쟁 역사상 이례적인 것으로
전략적으로 아주 치명적임
우리 국군은 28일 오후부터 분산철수하는 낙오병을 수습하고 부대 재정비함
29일엔 시흥시에 전투사령부를 설치 3개 부대를 한강 이남에 배치해 방어선을 구축했고
29일 미군 참전 결정
7월 1일 일본 주둔 미 24사단 긴급 투입되는등
국군은 3일간 비교적 안정적으로 부대를 재정비하고 방어를 준비하게 되었음
또한 국군은 3일동안
지연전 전략 (공간을 내어주고 시간을 얻는다) 수행능력을 확보했고
방어력을 갖춘 한국군이 지연전을 펼침에 따라
철수를 하면서도 반격 작전을 준비할 수 있게됨
미군 사령부의 전쟁일보중 1951년 5월 15일자를 보면
김일성이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한 원인을 분석한 결과
가장 큰 원인중 하나가 서울을 점령한 뒤 강을 건너는데 시간을 지체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고함.
왜 북한군은 3일간 진격을 할 수 없었던 것 일까?
첫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게 바로 국군이 한강의 다리를 폭파해 건널수 없었다는 것임
국군은
28일 새벽 북한이 서울 진입의 관문인 미아리 방어선 돌파와 동시에 한강 인도교를 폭파
광진교,한강인도교,경인철교상행선을 완전 파괴함
이로서 제대로된 도하 장비가 없는 북한은 350대의 T-34탱크는 곧바로 진격할 수가 없었음
하지만 한강 철교는 철교 3번째 경간에 침목과 철로만이 파괴 되었을뿐 나머진 멀쩡했음
한강철교의 파괴된 철로와 침목을 교체,복구하는데는 몇시간 정도면 충분했고 당시 국군은 북한군의 공격으로 제대로된 방어조자 하지 못한채
후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란을 틈타 즉시 수리했다면 T-34탱크 350대가 한강을 도하 할 수 있었음
또한 보병들도 한강의 나루터를 이용하면 대규모 병력이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었음
즉 북한군이 한강을 도하 하지 못한것이 아니라 도하를 하지 않았다는 것임
두번째 추측으로는 북한군이 서울만을 제한적으로 점령하면
나머지는 남로당 빨갱이 새1끼들이 알아서 들고 일어나 적화 통일이 될 것이라는 썰이었음
김일성도 이 내부분열에 아주 큰 기대를 했다고함
하지만 49년 여름 국내에서 대대적인 빨치산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무산된 것으로
6.25전쟁 당시엔 김일성도 빨치산에 대한 기대를 접었었고
한강에 도달하면 먼저 도하부터 실시하라는 문서 또한 발견되면서 묻혀버림
그럼 왜 북한군은 3일간 한강에 머물렀던 것일까?
그 진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북한의 남한 침략 계획을 보면 알 수 있음
북한은 미군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소련의 말에 따라
이 선제타격 작전도를 만들어진 3단계 작전을 세움
1단계-방어선 돌파 및 주력 섬멸
2단계-전과 확대 및 예비대 섬멸
3단계-소탕작전 및 남해안 도달
그 3단계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1단계가 바로 방어선 돌파 및 주력부대 섬멸인데
또 그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수원이었음
수원은 북한군 2사단이 중앙 전선에 위치한 춘천을 하루만에 점령하고
즉시 수원으로 내려와 후퇴하는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국군의 주력부대를 섬멸한다는 작전이었음
이 작전만 성공 한다면 북한은 1개월 안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음
6월25일 춘천에 투입된 북한군 2사단은 전쟁 2개월 전 실시한 북한군 검열에서 최우수사단으로 선정된 정예부대였음
이놈들은 6월25일 새벽 개전 30분만에 춘천의 첫 관문인 모진교를 건너 옥산포로 향함
하지만 북괴가 모진교를 건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6사단 7연대가 즉시 출동해 옥산포에 도착
진격해오는 북한군에게 일제 사격을 가했음
거침없이 내려오던 북한군에겐 뜻 밖의 기습공격에 놀라 당황했음
거기다 온통 보리밭이었던 옥산포를 둘러싼 우두산에는 1개월 전에 사병과 춘천 학생들을 동원해서 참호를 파는등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었음
결국 북한군은 지형적 열세로 인해 하루만에 점령해야 했던 춘천의 옥산포에서 하루를 보냄...
그렇게 2일간 옥산포를 지키던 한국군은 포위 되지 않기 위해
장소를 소양교로 옮겨 방어전을 실시했음
(전투 당시 총탄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소양교)
춘천으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소양교는 춘천 방어의 핵심이었음
여기선 국군의 포병들이 활약함
(당시 6사단 1대대 중대장 이대용)
북한군은 화력상 우리나라를 압도할 정도로 엄청난 화력을 가지고 있었음
하지만 우리나라의 뛰어난 사격 지휘,관측등의 실력이 차이가 났었는지 북한군은 국군의 포 사격에 엄청난 피해를 입음
하지만 6사단의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소전선들은 모두 허물어져 있었고
결국 27일 저녁엔 6사단도 어쩔 수 없이 후퇴를 해야 했음
하지만 6사단은 하루만에 춘천을 점령한다는 북한의 계획을 무산시키고
춘천에서 무려 4일이라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엄청난 공적을 세움
북한군 2사단이 춘천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때 북한의 또 다른 주력부대인 12사단 역시 홍천지역을 점령해
6사단을 괴멸시킬 목적으로 진군하고 있었음
이 12사단은 중국내전에도 참전한 실전 경험이 있는 북한의 또 다른 정예부대였음
12사단은 진군중 춘천에서 문제가 생기자 2개 연대를 춘천의 2사단으로 지원해줌
그런데 이 12사단에도 문제가 생김
북한군에 밀려
후퇴하던 6사단 2연대가 폭 5미터 정도의 말고개에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고
좁은 길을 따라 진격해올 탱크를 T-34를 막기위해 인근 산에 대전차 포와 소총을 배치했음
(당시 11인의 육탄 결사대 대원 조달진 할아버지)
그리고 당시 교육을 받던 중이던 연대장이 귀환해 11인의 육탄 결사대를 결성하고
말 그대로 결사항쟁을 시작함
말고개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국군과 소총으로 전투를 벌이다가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자
탱크를 투입 하지만 당시 말고개는 구불구불한 산길이었기 때문에 길이 굽어지는 곳 마다 육탄돌격대가 매복해 있었음
육탄돌격대는 적의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고 다시 뛰어 내리는 것이 임무였음
당시 육탄돌격대 대부분이 사망함.
(당시 11인 육탄 결사대 대원 조달진 할아버지의 증언)
이렇게 말고개에서 결사의 항쟁을 벌인 국군은 대전차포의 지원 속에서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북한군 탱크 10대를 격파하는 성과를 올림
또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적 전차에 뛰어오르는 육탄 결사대의 이런 희생 끝에 북한군 12사단도 2사단과 마찬가지로
28일까지 홍천으로 진격하지 못했음.
결국 이러한 전투덕에 북한군의 속전속결 작전의 1단계의 일정이 틀어져 춘천 점령이 7월 1일 까지 늦춰졌고
서울을 침공한 북한군 5개 사단은 중부전선의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이 국군을 포위할때 까지 기다렸다가
국군을 포위 후에 일망 타진 하기 위해 7월 1일에서야 한강을 도하 하게됨
하지만 작전을 눈치챈 국군은 한참 남쪽으로 후퇴한 이후였고
수원 이북에서 국군의 주력부대를 섬멸하려던 계획이 무너져버림
북한군이 3일간 진격을 멈춘 덕에 국군은 전력을 보강하고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방어계획을 수립했음.
그로 인해 북한의 남한 점령 계획 또한 무너져버림
6월 25일 개전 이후 우리나라는 수많은 전투를 겪었고 기억한다.
하지만 정작 1950년 전쟁초기의 가장 중요하고 또 치열했던 전투가
제대로 방어 한번 못하고 계속해서 후퇴해야 했던 초기 전투들중 하나로만 기억되고 있는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한국전쟁의 초기전 하면 일방적으로 북한군에 밀려
미군이 참전한 이후에나 재정비를 해 반격을 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미군이 참전하기 이전 춘천에서의 성공적인 방어로 인해
재정비가 가능했던 것임을 잊지 말자.
마지막으로
우리나라를 목숨걸고 지켜주신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감사합니다.
애국심 평가
목숨걸고 지켜주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감사하면 추천 아니면 반대
설마 그러진않겟지^^